아래 기사보시면 5세기를 중심으로 신라왕족의 고분군을 점령했던 적석목곽분양식과
중앙아시아의 흉노고분을 비교하려는 연구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맨 아래 사진은 경주 고분군에서 발굴되는 전형적인 신라의 적석목곽분 양식입니다.
정말 신기하네요.
5세기에 충북 충주(당시 이름은 국원성(고구려 국내성과 같은 위상의 이름을 준것으로 보아
당시 이지역에 고구려인들이 많이 이주해왔음을 추정 가능))에 건립된 중원고구려비에서
신라의 임금을 동이매금이라 했는데... 그 이유가 여러측면이 가능하겠지만
당시 신라를 지배하고 있던 내물왕계 즉 김씨세력이 전형적인 흉노풍습을 지녀 이질적으로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구려도 분명히 흉노의 문화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았지만 부여 고구려 고조선으로 대표되는
예맥족과 흉노는 기본적인 경제영위 생활방식에서부터 여러 문화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예맥족은 농경과 목축을 모두 중시한 정주민족. 그러나 흉노는 전형적인 떠돌이 유목민족.
특히나 흉노는 편두가 많은데 부여,고구려 사람들은 편두풍습이 없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볼때 저멀리 서북방에서 접해오던 흉노인들의 머리모양과 여러 풍습들을
정반대 한반도 동남쪽 신라땅에서 보게되니 신기하기도 했겠죠
엄연히 삼국사기에는 진한이 고조선유민들로 이루어진 나라였다고 하고 삼국지위지동이전 등에도
낙랑 등지에서 진한으로 사람들이 이주해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경주 부근에서 예맥지장이라는 삼한시대
인장이 발견된것처럼 진한지역도 기본적으로는 예맥족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한반도 동남쪽이라고
유별나게 고구려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풍습이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첨예한 대립각을 보이던 백제에 대하여는 백잔 잔국이라고 멸칭은 했으나 전혀 동이니 남만고 같은
이질적인 종족의 의미를 담은 표현을 하지 않던 고구려가 반대로 우방이자 당시까지는 충실한
종속국이었던 신라를 동이라 표현한 것은 고구려 천하관의 측면도 있지만 신라의 지배자들이
편두를 하고 전형적인 흉노적 풍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그들의 왕을 동이매금이라 부른게 아닐까 싶네요.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사견입니다.
http://media.daum.net/life/living/tips/newsview?newsId=20150922103628172
국립문화재연구소 카자흐스탄 '카타르 토베 고분군' 1차 발굴 연합뉴스 | 입력 2015.09.22 10:36
카타르 토베 고분군. <<문화재청 제공>> 중형 고분에서 나온 금제 귀고리. <<문화재청 제공>> 올해 발굴조사한 소형 고분. <<문화재청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카자흐스탄 '카타르 토베 고분군' 1차 발굴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 돌무지덧널무덤과 돌을 쌓아 만든 중앙아시아 초원 적석계(積石系) 무덤 사이의 관련성을 찾기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