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전에 올린 퍼온글의 연장입니다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다음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 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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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pva.tistory.com/624
"우리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강인한 성품을 잘 알게 되었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사한 농간 탓에 조국을 잃었고 황후마저 암살당했으며, 그들 고유의 복장을 입지 못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사용하도록 강요 받았다.
나는 길을 가다 한국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 옷에 검은 잉크가 마구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 경찰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흰옷 입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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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셔우드 홀 선교사가 벌이던 ‘결핵퇴치운동’에도 동참했습니다. 키스는 해주 결핵요양원에서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발행한 크리스마스 실의 도안을 3번이나 그려줬습니다. 당시 크리스마스 실에 그림을 그려준 화가는 키스와 운보 김기창뿐입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대금 연주자’ ‘내시’ ‘종묘제례 관리’ ‘무인’ 등 사라져가는 조선의 유물들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키스의 몇몇 그림들은 장신구까지 자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일본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표현했고,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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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 수년간, 조선의 탁월한 그림, 도자기, 조각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나는 일본이 이 귀중한 문화재를 본고장인 한국으로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올바른 처사이기 때문이다."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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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는 이렇게 글과 그림을 통해 일제의 잔인함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또한, 한국을 그린 작품들로 한국 밖에서 전시회를 연 최초의 서양화가이기도 하죠. 그녀는 20세기 초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전도사였습니다.
키스는 1936년 이후, 다시 우리나라를 방문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는데요.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엘리자베스 키스 전시회가 열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평소, “나의 특별한 한국”이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키스에게, 이제는 우리가 “조선의 특별한 그녀, 엘리자베스 키스”라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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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조선 후기 그림은 흑백 사진밖에 없어서 답답했는데 이런 색칠된 그림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또, 가끔 일제찬양론자들이 동시대 일본을 삐까뻔쩍하게 그린 서양 화가들 그림 들고오면서 시비거는거 기분 나빳는데 좋은 반박 자료가 생긴것도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보시면 다양한 그림체가 보이실텐데요,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일본풍 영향으로 그린 그림도 있고 서양화풍으로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스타일로 그렸던 조선의 풍경이 상상 이상으로 멋있는건 달라지지 않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