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하얀색의 (a)는 북부여 이전 존재할 것으로 보는 초기 부여의 위치로 추정하는데...실제 그 위치 추정은 상당히 어려운 편으로 대충 이쯤 아닐까 함...검정색의 (a)는 탁리국 내지 고리국 ... 둘 다 (a)로 표시했네 ㅠ.ㅠ
⒝ 및 ⒝' 초기 북부여와 흑룡강 넘어 확장 시 북부여 강역
(c) 북부여의 후국이었던 갈사부여 및 후대의 동부여
부여의 위치에 대한 사서 상의 기술은 상당히 모호한데 ... 그 대상이 되는 지역은 엄청 넓은 편... 내가 만주는 가보지 못했지만 ... 미국에서 아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중북부 프레리 지역 같은 곳을 다녀 보면 정말 넓다는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음... 하여간 너무 넓으면 방목이나 하지 국가를 만들어 모여살기 힘들다고 보아야...
고조선 시대 및 그 후 열국 시대 우리 나라의 소국 들은 대부분은 산맥의 분지 지역에 위치하였지만 부여 만은 이와 다르게 평야지대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하지만 그렇다고 흑룡강 넘어 벌판 지역까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북만주는 평야 지대가 엄청 넓고...이 평야는 요하 동쪽과 흑룡강으로 지역이 나누어지는데...요하나 흑룡강은 반농반목 사람 들이 대규모로 쉽게 건너가기 쉽지 않음...흑룡강은 늪지를 제외할 경우 요하보다도 더 넓음 ...그렇다면 흑룡강을 넘어 부여의 강역이 넓어지는 것은 한참 후인 후대의 얘기...그리고 실제 넘었는지도 불확실...그 넓은 강을 넘을 경우 중앙정부의 통제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분리된다고 보아야...
그리고 우리 나라 고대 국가의 중심지는 평야지대에 아닌 분지나 산을 끼는 넓은 해안가 지역이라는 점에서도 부여의 위치가 흑룡강을 넘어서까지 확장되는 것은 안 맞을 수 있음...즉, 북만주 일대는 부여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는 것 ... 이는 부여가 유목국가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고 ... 물론 흑룡강 넘어 진출했을 수도 있겠지만...그 땅이 그다지 쓸모있지는 않았을 듯... 어쨌든 농경사회에서 농사짓지 않는 땅은 넓어도 큰 의미가 없음(부여는 반농반목 국가)
그리고 동명(성왕)의 출자지인 탁리국의 위치 또한 대흥안령과 소흥안령이 만나 계곡과 강이 낀 평야지대 외에는 마땅한 위치가 없음...그런데 만약 탁리국의 위치가 여기라면 소위 예맥족 계열의 분포 위치에서 상당히 떨어진 쪽이라 보아야 하고...그래서 중국에서 말하는 북이(北夷)라고 말한게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함...
혈연적으로는 모르겠으나 지정학적 위치가 예맥족과는 너무 떨어져 있고...환경도 많이 다르기 때문에 종족적 특성이 많이 다룰 수도 있을 듯...하지만 동명이 부여 쪽으로 왔을 때 말이 통했을거라고 본다면 같은 계통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동명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니 이 역시 근거를 찾으려면 어려울 듯
그리고...몽골과의 경계를 이루는 대흥안령 동쪽인 동시에 요하강 남쪽은 스텝 즉, 초원으로 유목지역인데...이 역시 우리 역사의 강역이라고 보기 어려움...뭐 동호 쪽의 강역이라고는 볼 수 있지만...이들이 우리와는 달리 유목국가라는 점에서 아무리 혈연적 친연성이 있다고 해도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얘기하기는 어려울 듯... 왜냐하면 농경족속과 유목족속을 같은 족속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 사실 아무리 피가 섞여도 문화나 생활환경이 엄청 다르면 같은 족속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
요하의 중상류의 서쪽 스텝 지역은 동호나 선비의 땅 ... 선비의 경우도 중원 쪽으로 진출하기 전에는 목축 중심이었음...그리고 초기의 선비는 이 쪽이 아니고 대흥안령 서쪽이자 만리장성 윗쪽이 발원지였음 ... 탁발선비나 우문선비 등 선비란 선비는 모두 마찬가지... 후대에 들어 대흥안령 동쪽으로 넘어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 탁리국 추정 위치 ... 주황색 선 또는 보라색 선으로 그어놓은 곳...이 중 하나나 모두
⑮ 스텝지역(초원)으로 대흥안령 동쪽으로 몽골 고원과는 분리되어 있지만 그래도 다른 대흥안령 보다 낮아 상대적으로 쉽게 넘어올 수 있는 위치...동호나 선비가 여기 정도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