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01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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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근대화는 교육의 확산,산업화,도시화 3개로 설명할 수 있음. 여기서 산업화를 해석해주는 것이 로스톤의 경제발전단계 5가지와 마르크스의 자본론임. 마르크스 경제학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크게 시대별로 노예제사회,봉건제사회,근대식 자본주의사회로 나뉘었는데 노예제사회는 노예와 노예주인(모든 이윤이 노예주인에게 돌아감),봉건제 사회는 농노와 지주(농노에게 땅을 주고 살게해주며 이윤을 가져감) , 근대식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가(인간의 신체를 상품화하여 노동자와 자본가 둘다 이윤을 가질 수 있음)로 분류했음.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뒷받침하는 자본론에서 근대산업화의 출발을 자본가와 노동자의 등장. 즉 노동자(인간의 신체를 판매하는)의 발생 '상품화'에서 규정했음. 미국이 남북전쟁 이후 빠르게 근대화된 것도 바로 공장지대를 보유한 북부자본가들이 흑인노예들을 대거 끌어모으며 노동력을 충당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며, 프랑스와 벨기에 역시 콩고민주공화국과 세네갈에서의 대거 흑인노동력을, 영국은 인도, 포르투갈은 브라질. 등등.. 마찬가지 였음. 즉 산업화 측면에서 근대화의 출발은 당연히 농노와 지주 관계였던 봉건제가 깨지고 이러한 노동자-자본가 관계의 근대식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말함. 근대식자본주의의 특징은 프롤레타리아의 인권이 농노,노예보다 개선된다는 점, 시장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점. 이외 인간의 노동력,신체를 비롯한 많은 요소들이 '상품화'된다는 점이 있음. 이런 마르크스 경제학, 자본론의 논리로 당디 조선을 설명해보자면 조선은 1948년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법 이전까지 농노와 지주의 단계. 마르크스 자본론에서 설명하는 봉건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음. 갑오개혁 이후 '형식적' '껍데기'로나마 신분제의 격차가 완화되었다고 해도, 대부분의 땅은 여흥 민씨와 안동 김씨등의 세도가. 즉 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민들이 먹고살기 위해선 여전히 '농노'의 형태로 '지주'인 세도가에 들어가 땅을 얻고 살아야했음. 이러한 현상은 일제가 들어오기까지 지속됨. 즉 농노와 지주의 관계가 깨지지 못한 점중 하나는 세도가로부터의 토지환수에 실패한 점이 크다고 볼 수 있음. 예컨대 고종과 동갑인 메이지는 1869년 판적봉환으로 각 번의 다이묘들에게 땅을 환수해 국영지로 만드는데 성공함, 반면 고종의 광무개혁은 세도가의 영지를 국유화하는데 앞장서긴 커녕, 오히려 그 '광무개혁' 자체가 여흥민씨 세도가의 부유화를 더 촉진시키는 발판이 되었음. 가장 큰 이유는 '동도서기론' 이른바 동양의 윤리와 제도, 사회상을 유지한 채 서구의 껍데기를 받는다가 가장 큰 총체적 원인. 동도서기론 덕분에 세도정치는 을사조약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그 결과 조선은 사회적,경제적 변혁을 이루지못한채 멸망한 것임. 뿐만 아니라 이언모리스의 사회발전지수로만 따져봐도, 모리스는 사회발전지수의 척도를 크게 4가지로 분류 ▶ 1. 에너지 획득 ▶ 2. 도시성(urbanism) ▶ 3. 정보전달 능력 ▶4. 전쟁 수행 능력로 봤는데 4개는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크게 보면 '도시화'의 바탕을 둔 학설임. 이는 켄덜이 주장한 도시화는 곧 산업화를 불러일으킨다라는 제창과 크게 다르지 않음. 그럼 조선이 과연 도시화가 지속되었는가?에 대해서 한번 알아봐야함. 19세기 조선의 도시화율은 인구 1만명당 2.5%로, 유럽의 평균 도시화율이던 9%에 크게 못 미치는 수로서 이러한 시장의 미발달은 자원획득률을 낮추고, 정보전달능력을 감퇴시키며, 전쟁수행능력을 강화시키지 못했음. 조선의 도시화율이 미발달한 이유에는 무엇보다 노동자-자본가 단계가 조성되지 않은 점이 큼. 자본가는 자유시장의 틀에서 노동력으로 얻은 이윤을 통해 자본을 축척해 시장경제 활성화를 주도하지만, 조선의 사회는 대부분 농업위주의 산업으로, 자본가의 기틀이 되는 상업이 미약하여 이러한 형성단계가 만들어질 수 없었음. 상업이 자본주의의 기틀이 되는 이유에는 우선 상업은 외래문명의 유입을 증가시켜 문명이 발전하게 하고, 화폐가 유통됨으로서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고 이윤이 쌓이면서 자본주의적 내공이 축척되는 시기를 만들 수 있게 됨. 일본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상업이 발달했던 일본은 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에도(100만), 오사카(30만),교토(20만)등 대규모 도시들이 '물류마켓'으로서 시장경제가 활성화됬음. 우리가 알다시피 보통 자본주의를 볼 때 상업 자본주의, 산업 자본주의, 수정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단계별로 분류하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상업 자본주의에 속함.이러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농업에 주력했기 때문에 화폐 유통이 미약했고, 시장경제가 활성화될 수 없었던 것이며, 외래문명의 유입이 거의없어 문명의 다양성도 점차 줄어들게 된 것임.
결국 조선은 큰 변혁없이 전근대국가에 머물수 밖에 없던 필한적 상태였던 것이며,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구조를 완전히 깨부수는 변혁이 없다면 영원히 근대화가 불가능한 시한부 국가였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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