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는 흑수말갈이 세웠나요?
ㅡ 아니요
ㅡ 완안여진이 세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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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하면서 주로 혼하 유역, 시라무룬허 유역으로
발해주민 대거 사민
ㅡ 곧 이어 동단국이 세워졌다가 1년여 만에
발해 각지의 반란을 수습하지 못 하고, 또
발해주민이 고려로 망명해 가고, 흩어져 야인이 되는 상황을 감당하지 못 하고 현 의무려산 일대로 쫓겨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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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인 중심지 백성들을 현 태자하를 중심한 지역에 사민하여 숙여진 18주를 편성
ㅡ 이들은 거란의 호적에 기재된 자들
ㅡ 반면에 북류 송화강을 기준으로 거란이 통제하지 못 하는
발해인들은 생여진으로 불림
ㅡ 또한
ㅡ 현 북류 송화강과 혼하 상류 사이에서 활동하다가 986년에 대대적으로 정벌된 여진족 세력이 있으니 이들이 정안국
ㅡ 이 정안국 잔존 지역에 설치된 것이 이른 바 강동 6주
ㅡ 현 요원시와 사평시, 장춘시 등지에서 활동하며 명목 상 거란 함주병마의 관리를 받는다고는 하나 역시 자유민인 여진족이 바로 정안국의 잔족세력으로서 이른 바 회패
ㅡ
금나라 세운 완안여진은 옛적에 흑수말갈로 취급된, 흑룡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오국성 지역을 통해 하얼빈 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맞으나 김함보로 상징 되는 고려계(신라 말 서북한에서 이주) 이주민 집단에 의해 새로운 정체성을 지니게 됨
ㅡ 이 시기 여진족 자체가 거란 동경도 바깥의
발해 잔존 주민, 거란 동경도 안에 있어도 출사하지 않고 산곡잡거한
발해유민, 기타
발해 당시 지방민 및 피지배 족속의 총칭이자 비칭
ㅡ 거란의 요나라와 고려 전기에도 흑수말갈과 흑수여진이라 불린 집단은 여전히 존쟈
ㅡ 흑수말갈 : 흑룡강 안팎과 눈강 사이에서 활동
ㅡ 흑수여진 : 흑룡강 남안의 연해주에서 활동, 훗날 고려에 귀부
ㅡ 거란의 괴롭힘을 지속적으로 겪으면서 하얼빈의 완안여진을 중심으로 북만주 지역과 동만주 지역의 여진족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것
ㅡ
금나라는
발해유민이 세운 것은 맞으나 이미 새로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거란의 호적에 등재돼 있던 비교적
발해 지배층에 속했던 이들의 후손들과 이질성을 띠게 됨(
발해 멸망부터 금 건국까지 2백여 년이 흘렀음)
ㅡ 비근한 예를 들면
ㅡ 구한말, 20세기 초에
ㅡ 만주에서 땅주인 행세하던 마적단보다 못한 수준이 김함보 이전의 완안여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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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 - 북한사람 - 조선족 - 고려인
즉 정체성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