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질문
1. 남해 차차웅 11년(8) - 14년. 왜가 100여척의 병선을 보내 민가를 노략하여 6부의 정병을 내보내 깨트렸다. - 석씨왕조 기록
2.탈해 3년(59) - 왜와 강화를 맺음
3. 탈해 17년(73) -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해 각간 우오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이에 대한 삼한사의 재조명의 해석
석씨왕조가 경주에 정착하는 과정.
석씨왕조가 한반도 서해안을 돌아 남해안에 상륙을 시도. 낙동강 서쪽에 상륙했다가 얼마 못 있고, AD 44년경에 수로왕의 남가야에 밀려 떠남
그 다음 낙동강 동쪽에 다시 상륙을 시도. 이번에는 먼저 와 있던 왜(임나가야)와 강화를 맺는 등 조심스러움. 2번 기록.
그런데 석씨왕조 세력에 위협을 느낀 왜가 공격. 3번 기록.
여기서 석씨왕조는 밀려서 낙동강 하류 동쪽지역을 동해안을 돌아 월성으로 향함.
병선 100여척으로 신라를 공격한 1번 기록은 2번과 3번 기록 사이에 있어야 함.
Q: 1번 기록을 보면 100척의 병선을 동원하여 침탈한 왜인들을 6부의 정병으로 퇴치했다고 버젓이 나옵니다. 6부는 경주 중심에 있는 세력인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거죠 ?
두번째 질문
광개토대왕 비문 영락9년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었습니다. 노객(신라왕)은 대왕의 백성된자로써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였다.
10년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戍兵으로 두셨다.
삼한사의 재조명 내용 중
396년에 잔국이 토벌되고 그 피난민이 낙동강 하류로 몰려들었다.
당시 신라 땅에 가득찬 왜인은 왜가 아니라 궁월군과 아지사주의 백제 120현민이다 -잔국의 피난민- 그들은 신라의 방해로 (열도로)건너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응신은 갈성습진언을 신라에 파견한다(AD397). 하지만 3년 동안 그에게서 소식이 없자(응신 14년 AD400), 응신은 백제 120현민을 도해시키고자 이번에는 군대를 신라에 파견한다. 이것이 응신 16년 8월조에 나오는 평군목토숙녜와 적호전숙녜에게 정병을 주어 신라로 보낸 기록이다. 이후 두 숙녜는 신라왕을 위협하여 백제 120현민을 도해시키게 된다.
Q:책에서는 그들은 군이 아니라 피난민이고, 신라의 방해로인해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근데 비문에는 왜인이 아닌 왜군으로 표현했고, 그들은 국경 뿐만 아니라 수도까지 가득했다고 하며 이에 신라왕이 위협을 느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 상황인데, 이것을 '신라의 방해로 백제 120현민이 건너가지 못하고 갇혀있는것'이라고 해석하는건 어불성설 아닌가요?
또한 비문에는 고구려군이 몰려오자 왜군이 퇴각하였고, 그들을 쫓았더니 임나가라의 종발성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는 위에도 나와있듯, 전혀 언급이 없는 부분.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명은 무엇인가요?
또한 당시 열도 왜국에서 신라를 위협할 정도의 군대를 한반도로 투사할 능력이 있었다는것도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