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원체 오래된 떡밥(?)이긴 한데
미국의 한국사 개척자인 제임스 팔레 교수가 이 학설을 주장한후
한국인 사학자들과 주로 논쟁을 했었죠.
제임스팔레 교수의 의도는,
조선사회의 후진적 측면을 강조하는 "노예제 사회"라는 단어 자체에 충격받을 필요가 없다.
미국도 노예제 사회였다.
우리는 그런 후진성을 반성하면서 더 발전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뭐 그런 좋은 의도였죠.
한국인 사학자들이 이 학설에 반대한 이유는 뭘까요.
단순히 구닥다리 역사발전론 패러다임(조선 근세사회론)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요?
제가 보기엔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백인의 의무"라는 말이 통용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칭 명예 백인인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주기 딱 좋은 단어였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한 것이죠.
그게 진짜 이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뭐 각론으로 들어가면 한도끝도 없을 것이긴 하지만, 통찰력을 나름 갖추려고 노력을 하면서 이런 문제를 들여다 봅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노예제 사회인 미개한 조센징을 우리 대일본제국이 근대화시켜주기 위해 식민지로 삼아 계몽시켜 주었다"
라는 궤변을 위한 딱 좋은 아주 선동적인 단어 아닌가요.
"노예제 사회"라는 말 말이죠.
사실 조선시대(14~19세기)에 걸쳐서, 조선과 일본은 서로 수평적으로 비교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질적인 완전히 다른 사회죠.
일본은 전형적인 중세 봉건사회 구조이면서, 농노(평민으로 미화해서 부르는)들이 생산을 담당해 주는 사회였고.
그런데 조선은 봉건사회 구조는 완전히 탈피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사회인데, '노비'라는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였고요. 특히 이 노비는 동시대 중국,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조선에서만 남아 있었다는게 굉장히 특이한 부분이죠.
조선의 노비가, 서양에서 부르는 노예 개념에 부합하느냐 아니면 또 다른 거냐 이런 것을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고, 다만 노비의 존재는 조선사회의 후진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기층계급으로 '농노'들이 주축이었으므로, 조선의 노비와 비교할 때 실질적으로 사실 어느쪽이 더 후진적이냐를 가지고 계량하면 막상막하의 동등한(?) 후진성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들더군요.
(참고로 농노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고, 토지에 예속된 사실상의 노예라고 보죠.
일본의 농민들이 이 농노의 범주에 정확하게 맞아들어갑니다.
반면 조선의 농민들은 거주이전의 실질적 자유가 있었고, 대략 1~1.5세대마다 거주지를 바꾼다고 하더군요.
일구던 농토를 팔고 다른 곳의 땅을 사서 이사를 간다던가 등등이 매우 활발한 사회가 조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요.
또 조선과 일본 모두 계급사회인 것은 맞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계급간 이동이 의외로 일본보다 훨씬 더 활발했고요.)
또 일본은 중앙집권을 이룬게 메이지유신에서 비로소 가능해 졌으므로, 중앙집권 달성 시기를 놓고 따지면 15세기 초에 이미 사병이 혁파완료된 조선과는 수백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역사발전론적 관점에서 일본의 후진성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제 생각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비"제도는 후진적인 제도는 맞다.
2. 하지만 그거 하나 가지고 조선사회가 후진적인 사회라고 단정짓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3. 전통사회의 후진성을 판별하기 위한 '지표'는 그것 말고도 무수히 많으며, 전체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불러 마땅할까요?
그건 뭐 각자 생각하는 바에 따르면 될 것입니다.
학계에서도 아직 결론이 내려진 것이 아니니까요.
다만, 제 개인적인 의견을 조금 써 보자면...
저는 "노예제 사회"라는 말의 정의를 좀 좁혀서 정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노예 계급이 만일 그 사회에서 싹 빠질 경우, 그 사회가 붕괴하는가"를 따져보고
만일 노예 계급이 빠진 그 사회가 붕괴된다면 노예제 사회가 맞고
사회에 별 영향이 없거나 유지가 된다면 노예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이렇게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 봅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노비계급이 싹 빠지더라도 조선사회는 별 문제없이 유지가 되는 사회니까요.
반대로 로마의 경우에는 노예들이 싹 빠지면 그대로 붕괴되는 국가였습니다.
즉 조선은 평민들의 생산력에 주로 의존하는 사회였고
로마는 노예들의 생산력에 주로 의존하는 사회였다는 것.
따라서 로마는 노예제 사회로 정의하고, 조선은 그렇지 않다고 구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개념이라고 봅니다.
(차라리 조선을 근세사회로 정의한 기존의 주류학설을 인정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후진적인 특성도 있었음을 인정하여,
"노비제도 같은 것도 존재했던 근세사회"라고 정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추가로... 이영훈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노예제 사회론을 부정하는 쪽에 있다가, 어느 시점부터 노예제 사회론을 긍정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더군요. 그런데 이영훈과 같은 사이비가 이렇게 입장을 바꾼 것을 보면, 순수하게 조선사회와 동시기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종합적으로 고찰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조선 노비제도만 들여다 보고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뭔가 불순한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