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삭군절도사(甯朔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1143년 요나라 북안주를 군으로 격하시키고 흥화현(興化縣)을 두었다. 1200년(승안 5년) 흥주를 설치하고 절도를 두었으며 군명을 영삭군으로 하였다. 2현 15,970호를 거느렸다. 1214년 몽골제국에게 점령당했고 밀운으로 치소를 옮겼다.
2.북경로(北京路)는 금나라가 설치한 로중 하나로 지금의 랴오시지역대부분을 관할했다.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요나라의 상경도, 중경도, 두하군주들을 통폐합시켜서 신설했으며 로의 중심지는 대정부(大定府)에 두었다.[
3.대정부(大定府)
대정부(大定府)는 거란이 설치한 옛 행정구역으로 요나라의 5경중 하나인 중경(中京)으로 불렸다.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 닝청 현일대에 대정부의 옛 고성이 남아있다.
북경로에 속했다. 중급부로 북경유수사를 두었다. 거란대에 중경따라 그대로 중경이라 칭하였다가 1153년(금 해릉양왕 정원 원년) 북경으로 칭하게 되었고 유수사, 도전운사(都轉運司), 경순원(警巡院)을 두었다. 굉서(紘鼠), 소라껍데기로 만든 술잔, 수유소(茱萸梳), 대모의 등딱지로 만든 안장(玳瑁鞍), 수유병(酥乳餅), 오미자가 났다. 64,047호 11현 2진을 거느렸다.
우선 朔이란 의미는 북쪽을 의미합니다.
금나라 입장에서 중경 근처를 북방이란 의미의 지명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조작된 역사를 배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옛 선인들 동서남북도 모르는 바보로 만드는 주장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며
옛 선인들 지명에 상당히 신경을 써서 작명하였으며 연원이 명확합니다.
명나라를 지나면서 동서남북도 모르는 자기 조상을 만들었으며 이런 기록이 수두룩합니다.
또한 삭주란 지명을 쓸 수 있었던 국가는 중국과 고려 뿐일겁니다.
그럼 甯朔軍 또는 寜朔軍(열하지 참조,甯과 寜은 同字)이란
기존에 그 지역에 있는 지명을 사용했다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중국이 주장하는 열하 승덕 등 부근에
주군현 이상의 큰 도시중에 朔이란 지명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제가 제시한 지역에
寜武 朔州와 이민*(현재 이민진), 이민채가 함께 있을 우연이 얼마나 될까요?
또한 이 지역 남쪽에 공교롭게도 興縣이 있습니다.
이런 우연이 또 생겨버렸습니다.
바보야? 삭주는 원래 한나라 7대 칸인 유철 때 설치한 삭방에서 유래했고 북위가 삭진(朔镇)을 설치했고 서기 545년 북제가 드디어 삭주(朔州)라는 행정을 설치했는데 중원에 위치하고 기껏 내몽골 자치구까지 다달은 그 한나라, 북위, 북제의 기준에서는 북쪽에 있던 지역이니까 댁이 말한 대로 '북방이란 의미'가 담긴 지명을 거기 설치함이 옳잖아
근데 삭주를 금나라가 처음 설치했다는 식으로 지껄이고 있으니 진짜 지능 수준이 돌고래보다 못해서인지 일부러인지 모르겠다
ㅡ 옛 선인들 동서남북도 모르는 바보로 만드는 주장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며
ㅡ 옛 선인들 지명에 상당히 신경을 써서 작명하였으며 연원이 명확합니다
내가 할 말을 선수쳐서 지껄이는 것도 능력이다
ㅡ 명나라를 지나면서 동서남북도 모르는 자기 조상을 만들었으며 이런 기록이 수두룩합니다.
선인들을 바보로 취급하지 말라며 정작 자신은 명나라 사람들을 조작범이자 사기꾼으로 취급하는 꼬라지
명나라가 수나라의 북동방 거점인 영주를 하북성 일대에서 지금의 조양시로 옳긴 등 조작을 벌이긴 했지만 그 짝이 상상하는 그 지명 이동은 없었음
춘추시대 이전에 삭주는 북적의 활동 영역이었고 전국시대에 조나라의 판도에 들어갔다. 진나라에 의해 안문군이 설치되었고 한나라 초기에 마읍현, 중릉현, 극양현, 영관현, 왕도현, 날현, 누번현, 선무현의 8현이 설치되어 안문군(雁門郡)에 속했다. 후한 말의 전란기에 삭주에서 농민의 도망자가 잇따라 이러한 현들은 인구가 희박해져 명목적인 존재가 되었다.
진대되면서 황폐한 삭주 부흥을 목적으로 욕령(현재의 옌먼 관) 이북으로 이민을 장려했다. 이것 때문에 인구가 증가했고 북위가 산시 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삭주에는 상건군(산인현 동부), 번치군(잉현 동부), 마읍군의 3군이 설치되었다.
621년, 당나라는 마읍군(馬邑郡)을 삭주로 개칭하여 현재의 지명이 사서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742년 다시 마읍군으로 개명되었다.
후진 때인 936년, 삭주는 요나라에 할양되어 순의군절도가 되어 부경(副京)의 하나인 서경도에 속했다. 오대, 요, 금, 원대에 걸쳐 선양현(鄯陽縣)으로 불렸고 송은 삭녕부(朔寧府)를, 금과 원은 삭주를 설치하였다.
명청대에 삭주는 대동부로 이관되어 중화민국의 성립 때까지 이어졌다. 1912년, 주가 폐지되면서 숴저우는 숴 현(朔県)으로 개칭되어 옌먼 도(雁門道)에 속했지만 도의 폐지에 따라 이듬해 산시 성으로 이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처음에는 차하얼 성의 관할이었지만 1952년에 산시 성으로 이관되었다. 1989년 1월 숴 현, 핑루 현, 산인 현을 관할하는 지급시로서 숴저우 시가 성립되었고, 1993년 7월 옌베이 지구의 폐지에 따라 그 관할이었던 옌 현, 유위 현, 화이런 현을 편입하여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