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C%97%AC%EB%AA%BD%EC%A0%84%EC%9F%81
전쟁종식을 위해 몽고와 강화협상을 하고 세조구제를 받아내다
몽고는 6차까지 고려침공에 실패합니다. 7차때는 강화도를 직접 공략하려고 했습니다만 곳곳에서 패전하여 실패했습니다
- 대원령 전투 (1255년 10월, 고려 승),조도 해전 (1255년 10월, 고려 승),아주 해전 (1256년 3월 / 지휘관: 충주도 순문사 한취,고려 패),3차 충주성 전투 → 대림산성 전투 → 덕주산성 전투(1256년 중순, 고려 승),온수현 전투 (1256년 6월 / 지휘관: 이천, , 고려 승),압해도 해전 (1256년 6월, 고려 승),애도 전투 (1256년 10월, 고려 승)
8차 침략부터는 작전을 바꾸어 전투보다는 전쟁종식을 위한 여론으로 바꾸기 위해 곳곳에 방화와 약탈을 하러 다녔고 실제로 효과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몽골군은 고려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합니다만 국민 여론은 전쟁을 종식하자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 창린도 전투(1257년 9월 / 지휘관: 웅진 현령 이수송, 고려 승), 기암성 전투(1259년 1월 3일, 고려 승), 한계성 전투(1259년 2월 / 지휘관 : 방호별감 안홍민, 고려 승)
9차침입은 최씨정권의 마지막 권력자 최의가 실각하고 김준이 실권을 장악한 지 한달만에 발생합니다
정권 기반이 취약한 김준은 예전처럼 강력한 대몽항쟁을 이끌 수 없었고 9차 침입을 막아낸 뒤 무신들까지 합세한 종전 여론에 의해 할수없이 원종을 몽고로 파견을 보냅니다
거기서 원종은 쿠빌라이와 강화협상 즉 평화협상을 하게되고 세조구제를 약속받고 전쟁은 끝을 맺습니다(1259년)
<세조구제>
1.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고
2. 사신은 오직 원나라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3. 개경환도는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4.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5.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6. 몽고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협정 내용대로라면 몽골인들이 고려땅에 거주를 못하니 인구조사도 못하고 공물량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습니다. 고려의 풍속과 제도도 바꾸지 못한다는 조건입니다
만약 몽고가 스스로를 전승국이라고 생각했다면 치욕적인 조건입니다. 몽고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몽고는 받아들였습니다.전쟁에서 이긴것이 아니었으니 일방적인 요구를 할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몽골은 고려 정복을 포기한지 오래고 단지 고려가 배후의 위협세력만 아니기를 바랄뿐이었기 때문에 협정은 성사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려와 몽고는 평화협정을 맺은것이지 항복 협정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몽고가 항복한 국가를 간접지배하면서 착취한 사례는 모스크바 공국이 대표적이며 타타르의 멍에라 부를 정도로 가혹했죠(아래 참조 )
만약 항복조건이었다면 모스크바 공국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겁니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 원과 결탁한 원종. 그리고 상호 영향을 주고 받은 고려와 원
협상을 성공적으로 한 원종이었지만 여전히 무신정권의 꼭두각시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왕권 복고는 그 이후 10년 뒤인 1270년에야 이뤄지죠. 1268년 임연과 공모하여 김준을 죽이고 임연의 아들 임유무까지 죽인뒤 개경환도와 왕정복고에 성공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무신정권을 제압한 고려왕실은 언제든 다시 무신정권에 의해 짖밟힐 수 있는 불안한 처지였습니다
임유무를 죽인 세력도 여전히 무신이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고려왕실은 왕권보호를 위해 원나라에 부마국이 되기를 요청합니다
원의 입장에서도 고려왕을 통해 간접 통치를 할수 있다고 여겼기에 동의합니다
지속적으로 딸을 보내게 되면 언젠가는 완전한 몽고인이 고려왕이 된다는 기대도 했었죠
(하지만 2대까지 몽고의 피를 받은 왕은 충숙왕뿐이었고 대부분 1대에 그치게 되거나 한국인을 어머니로 두었죠. 충혜왕, 공민왕은 어머니가 공원왕후로 한국인이었습니다)
상호 이해관계가 맞아서 부마국관계를 맺은 이후로 상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친척국가란 이유로 고려왕이 원황실에 의해 폐위될 수도 있었지만 원의 정치도 고려왕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충렬왕은 황위 서열 4위, 충선왕은 6위에 올랐을 정도였습니다
그로인해 원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마음대로 횡포를 부릴수도 없었고 공물을 강요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기껏해야 당시 상류층의 엄청난 사치품이었던 사냥매, 수달피 그리고 제주도에 '탐라총관부' 를 설치해 몽골의 말을 기르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세계시장으로 상권을 확대한 고려상인과 만주까지 다스린 고려왕
세계제국인 원의 상업 네트웍망에 포함되면서 전세계인들을 상대로 상업교류를 하게 되어서 대상인이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고려전기에 13명에 불과하던 거상들이 원간섭기 31명이나 활동하게 됩니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code=rp0702&index_id=rp07020001&content_id=rp070200010001&search_left_menu=1
특히 충혜왕 같은 경우 적극적인 무역을 통해서 고려 왕실의 재정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영토면에서도 고려왕은 더넓은 만주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충선왕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 무종은 그 보답으로 충선왕에게 심양왕이란 직책을 주고 만주를 통치하게 맡긴 겁니다
충선왕 이후 원이 망할때까지 심양왕은 고려왕족이 맡게 됩니다
인적 교류가 활발했던 양국 관계
원과의 관계중 공녀가 가장 수치스럽다고 여기는데 공식적으로는 80년간 713명이라고 하는데 50년간 2000명 정도라고 하는 연구도 있더군요
그 공녀들 중 상당수가 황후, 궁녀, 고관대작의 부인등이 되었고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하니 일제시대 성폭행을 당했던 위안부같은 경우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또한 고려여인보다 100배나 더 많은 20만명의 몽골여인들이 고려에 왔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몽고 뭉크하누대 바트술해 교수>
https://books.google.co.jp/books?id=tRxRCgAAQBAJ&pg=PT38&lpg=PT38&dq=%EB%AA%BD%EA%B3%A8%EC%9D%98+%EA%B5%B0%EC%82%AC%EA%B7%9C%EB%AA%A8&source=bl&ots=wEN5Tfsyb2&sig=D6bmSas4bIId1sOOkjjiKrzqcp0&hl=ko&sa=X&ved=0ahUKEwjBw9qbz-7OAhWIspQKHWQ_AyIQ6AEIXDAO#v=onepage&q=%EB%AA%BD%EA%B3%A8%EC%9D%98%20%EA%B5%B0%EC%82%AC%EA%B7%9C%EB%AA%A8&f=false
이 모든 파격적 관계의 바탕에는 몽고가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지 못한데서 오는 존중이 있죠
원나라와 관계에서 가장 부정적인 영향
원나라와 이렇듯 관계가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치명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은 원나라로 인해 고려 내부의 모순이 격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원과 결탁한 부원세력이 농민들을 착취하고 대농장을 만드는등 국가와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도 제대로된 대응을 할수 없었죠
내부 모순이 극에 달한 고려는 결국 조선으로 교체되게 됩니다
<몽고의 가혹한 모스크바 대공국 착취>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D%83%80%EB%A5%B4%EC%9D%98_%EB%A9%8D%EC%97%90
루스를 지배하게 된 몽골은 처음에는 직접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해서 행정 · 징세 · 징병 등의 업무를 집행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도 세 차례나 했다. 세금은 납세능력에 관계없이 머릿수대로 거두었다. 사정관의 징세는 철저했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은 참혹하게 진압됐다. 인구조사 결과는 징병에도 이용돼, 많은 루스인 청년들이 몽골을 위해 병역에 복무했다.
루스인이 반발하자, 13세기 말에 루스의 여러 공들에게 권한을 위탁하고 세금을 받는 간접지배 방법으로 전환했다. 몽골 지배하에서 루스는 북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공업, 경제, 산업, 과학기술 등이 붕괴되어 농업이 유일한 주된 나라로 변했다. 그나마 혹독한 기후와 황폐한 땅에서 쉽게 농업을 정착, 발전시키는 것마저도 어려웠다. 게다가 몽골의 징세가 빈약한 루스 경제를 더더욱 쥐어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