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키에서의 내용인데 너무 길어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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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이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원의 수도와 가장 가까운 바로 옆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30년간의 항전으로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국가간의 조약을 맺고 국가의 정체성을 보전한 것은 무신정권의 공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져서 조약을 맺은 것이 아닙니다. 몽고는 고려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무신 정권이 비난받는 이유와 반론
1 '최씨 정권은 대몽항쟁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몽골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운 적이 전혀 없었고 그저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복만 대책 없이 무기한으로 연기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과장되었다.
물론 최씨 정권이 격구를 일삼고 향락을 누리며 백성들의 원망을 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몽골의 제2차 침입 당시, 최우는 미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버티다가 총사령관이 살해당한 몽골군이 철수하는 틈을 타 북계병마사 민희에게 가병 3천을 주어 홍복원을 토벌하고, 홍복원의 가족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리고 제3차 침입 때는 희경과 명준을 파견해 개주에서 몽골군을 격파했으며 4년간 버티다가 1238년 겨울에 강화를 제의했고 제7차 침입에선 1256년 6월 이천에게 수군 200명을 맡겨서 온수현에 상륙해 몽골군 수십명을 죽이고 주민들을 구출했고 그해 10월 애도에서 몽골군이 애도에 상륙하자 별초군이 출격해 모조리 도륙했다.
그리고 몽골군이 철수한 뒤 북부의 여러 주현 대부분을 회복하고 몽골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토벌했다. 만약 이 반역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제2의, 제3의 홍복원이 연이어 출현할 것이므로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시의적절한 조치이자 공적으로 볼 수 있다.
2. 장수를 몇몇 달랑 보내서 현지에서 알아서 하라는 걸 높게 평가해서도 안된다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 당시 최씨 정권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당시 고려는 여몽전쟁 초반에 주력군이 야전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몽골군과 제대로 된 야전을 치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뒤 주력군을 강화도에 배치시켜 몽골군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좁은 수로만 믿고 병력을 내보냈다가 방어에 구멍이 생겨서 강화도에 몽골군이 상륙하면 그 뒤는 어떡할 것인가? 그리고 당시처럼 혼란스럽고 정부의 장악력이 떨어지는 경우 강화도에서 병력을 차출해 타 지역으로 보냈다가 그 병력을 손에 쥔 사령관이 마음을 달리 먹고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다. 가뜩이나 수도를 옮긴 뒤 본토 통제가 힘들어지는 상황인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고려는 내란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3 '애초부터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다'는 주장은 몽골 측의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몽골 제국은 금나라, 호라즘 왕국, 서하, 남송, 키에프 공국. 아바스 왕조 등을 잔혹하게 짓밟았고 지배층의 씨를 말린 바 있다.
4. 몽골군이 강화도를 접수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안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 또한 억지에 불과하다.
당시 강화도는 지금 우리가 아는 강화도와는 지형이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엔 개간이 덜 되어 있어서 평야가 극히 적었고 육지와 가까운 곳은 대개 협곡이어서 상륙이 불가능했으며 그나마 상륙이 가능한 곳은 갯벌이어서 몽골군의 기마들이 지나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강화도 앞바다의 폭이 압록강의 폭과 비슷한 정도이며 몽골군은 이보다 더한 폭의 강을 손쉽게 건넜다고 주장하는데, 이건 '강'과 '바다'의 차이를 망각한 억지일 뿐이다. 당시 강화도 앞바다의 물살은 매우 거세서 배를 띄우기가 매우 힘들어서 날씨가 안 좋은 경우 보름에서 최대 한달 간 해로가 끊기기까지 할 정도였다. 게다가 고려 정부는 강화도 주변 육지에서 몽골군이 배를 제작하지 못하도록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렸고 강화도 주변의 수많은 섬들에 방어시설을 건설하고 몽골군이 근처에 상륙할 때마다 별초들을 파견해 때려잡았다.
5 고려군이 졸전만 했을 뿐이라고 단정짓지만, 당시 고려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서 버티면서 때때로 몽골군과 싸우면서 상황이 안좋아질때 항복 사절을 보내고 공을 세운 이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부락을 현으로 승격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했고 각지의 고려군은 자신들의 목숨과 주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민중은 30년간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이런 그들의 투쟁을 단순히 '졸전'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친 비하이다. 몽골이 고려를 공격할 때는 5만 명을 넘긴 적도 없다지만 그 5만명이 한 두 차례도 아니고 아홉 차례나 쳐들어왔다. 고려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대응했고 몽골은 그런 고려를 쉽게 이겨낼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그렇게 졸전이나 일삼았다면 고려 백성들은 어째서 30년이나 국가를 위해 싸웠는가? 물론 막바지에 몽골군에게 앞다퉈 항복하는 일이 벌어지긴 하지만 30년 동안이나 저항을 지속했다는 것은 고려 정부가 암울한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행정 체계를 놓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성공적으로 몽골군을 격파한 백성들에게 상을 내리고 고을을 격상시키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여몽전쟁의모든 책임을 고려에게 떠넘기는 것은 지나치다. 이런 식이면 어느 누구던지 비난을 할 수 있으며 비난받지 않을려면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건데 이건 말도 안되는 것이다. 여몽전쟁을 야기한 세력은 어디까지나 몽골제국이며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세력 역시 몽골제국이다.
고려 정부가 잘못 한 것이 있더라도 이 일을 벌린 몽골군의 잔인무도한 만행도 잊지 말아야 하고 고려 백성과 군의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