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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05 14:42
[기타] 요사 지리지 1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3,683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기자는) 조선으로 갔고,(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기자는) 팔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왕위가 40여대까지 전해졌다.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진()나라 때 요동의 바깥 요새에 속하였다. 한()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을 설치하였다. 후한() 때에 청주()와 유주()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을 거쳐 손자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을 자칭하고 소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나라가 멸망시켰다. 진()나라가 고려(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는 고구려 왕 안( ; 광개토왕)을 평주목()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 ; 북위) 태무제()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나라 동경()이 바로 이곳이다.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의 대씨()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 ; 측천무후) 만세통천() 년간에 거란() 이진충() 에게 핍박받아 걸걸중상()이 요수()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이라 자칭하였다. 북쪽의 여러 나라를 병탄하니 영역이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 15부() 62주()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라고도 한다. 요나라 태조( ;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함락하고 발해의 왕 대인선()을 사로잡았다.(발해를) 동란왕국()으로 삼고 태자 도욕()을 인황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 4년(919)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와 중국인으로 동평군()을 만들어 방어주()로 삼았다. 천현() 3년(928) 동란국 사람을 옮겨 거처하게 하고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성의 이름은 천복()이라 하는데 높이가 3길(약 9m)이며 망루가 있으며 너비가 30리나 된다.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은 영양(), 동남은 소양(), 남쪽은 용원(), 서쪽은 대순(), 서북은 대요(), 북쪽은 회원(), 동북은 안원()이다. 궁성()은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높이가 3길이며 망루가 있으며 남쪽으로 3개의 문이 있어 누각처럼 장관이다. 사방 모퉁이에 각루가 있는데(각 각루) 사이는 2리나 된다. 궁성 담장 북쪽으로는 양국황제()의 어용전(殿)이 있다. 대내()에는 전각이 두 채가 있고 후궁전은 두지 않았다. 오직 내성사(使)의 부관()과 판관()이 지켰다. 대동란국()이 새로 세운 남경의 비명()은 궁문의 남쪽에 있다.

외성()을 한성()이라고도 하는데, 남시()와 북시()로 나뉘며 중간에는 간루()가 있다.(사람들이) 아침에는 남시에 모이며 저녁에는 북시에 모인다. 길 서쪽에는 금덕사(), 대비사(), 부마사()가 있는데,(이곳에는) 철 깃대도 있다. 또 조두타사(), 유수아(), 호부사(), 군순원() 등이 있다. 귀화영()의 군인 천여명이 황하와 삭주에서 망명하였는데, 모두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 동쪽으로 북오로호극()까지 400리, 남쪽으로 해변의 철산()까지 860리, 서쪽으로 망평현() 해구()까지 360리, 북쪽으로 읍루현()과 범하()까지 270리 걸린다. 동, 서, 남쪽 3면이 바다를 끼고 있다.

요하()에서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와 합하여 소구()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 청하(), 패수(浿)가 있다. 패수는 니하() 또는 한우력()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주필산()은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 정상에서 몇일을 머무르며 돌에 공을 세겼던 곳이다.

속칭은 수산()이다. 산정상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 모양의 무늬가 있어, 여기서 샘이 솟는데, 마르지 않는다. 또 명왕산(), 백석산()이 있다. 백석산은 횡산()이라고도 한다. 천현 13년(938)에 남경을 동경()으로 고쳤는데, 부()는 요양이라고 하였다. 호구 수는 40,604호이며, 주()·부()·군()·성() 87개를 관할하였다. 9현()을 통할하였다. 요양현() 본래 발해의 금덕현()이다. 한나라 때 패수현(浿)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으로 고쳤다. 발해 때는 상락현()이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선향현() 본래 한나라 요대현()인데, 발해 때는 영풍현()이었다. 신선전()에서 “신선 백중리()가 신단( ; 신선이 만든다는 장생불사의 환약)을 단련하여 황금에 붙여 백성을 구제하였다”라고 하였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학야현() 본래 한나라 거취현()인데, 발해 때는 계산현()이었다.

호구 수는 1,200호이다. 석목현() 본래 한나라 망평현()인데, 발해 때는 화산현()이었다. 호구수는 1,000호이다. 자몽현() 본래 한나라 누방현()인데, 나중에 불녈국()이 동평부()를 설치하고 몽주() 자몽현()을 관할하였다. 나중에 요성()으로 옮겨 황령현()에 편입하였다. 발해 때는 다시 자몽현이었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흥료현()은 본래 한나라 평곽현()인데, 발해가 장녕현()으로 고쳤다. 당나라 원화() 연간((806~820)에 발해의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족을 공략한 후 군읍()을 설치하였다. 이때 지금 이름으로 정하였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숙신현() 발해인 호구로 설치하였다.

귀인현() 순화현() 개주()의 진국군()에는 절도()를 두었다. 본래 예맥()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였는데, 발해 때는 동경용원부()이었다. 궁전이 있으며, 경주()·염주()·목주()·하주() 등 4주의 일을 감독하였다. 옛 현은 용원()·영안()·오산()·벽곡()·웅산()·백양() 등 여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주위가 20리이다. 당나라 설인귀()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고구려 장수 온사문()과 웅산에서 싸웠는데 석성()에서 활 잘쏘는 자를 사로잡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백성을 큰 부락으로 이주시키면서 성은 폐허가 되었다. 성종()이 고려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성터를 둘러보고 다시 수리하였다. 개태() 3년(1014) 쌍주()와 한주()의 1,000호를 이리고 옮겨 채우고, 개봉부() 개원군()이라 부르고 절도를 두었다. 다시 진국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경유수()에 예속되어 군사 관련 업무는 동경통군사()에 속하였다. 3주 1현을 관할하였다.

개원현() 본래 책성()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용원현()이라 하였고, 발해 때에도 그 이름을 사용하다가 요나라 초기에 폐지하였다. 성종이 동쪽으로 정벌할 때 다시 설치하고 군대를 두었다. 호구 수는 1,000이다. 염주() 본래 발해의 용하군()으로 옛 현은 해양()·접해()·격천()·용하() 등 넷이었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 수는 300이며, 개주에 예속되었다.(개주에서) 140리 떨어져 있다. 목주() 보화군()이 설치되어 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회농군()으로 옛 현은 회농()·수기()·순화()·미현() 등 넷이었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300이며, 개주에 예속되었다. 동북쪽으로 개주에 12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회농현() 하나이다. 하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길리군()으로 옛 현은 홍하()·송성()·길리()·석산() 등 넷이었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300이며, 개주에 예속되었다.

정주() 보녕군()이 설치되어 있다. 고려 때 주를 설치하였으며, 옛 현은 하나로 그 이름은 정동()이다. 성종 통화() 13년(995)에 군으로 승격되어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채웠다.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정동현() 고구려 때 설치되었다. 요나라 때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거주케 하였다. 호구수는 800이다. 보주() 선의군()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고려 때 주를 설치하였으며 옛 현은 내원() 하나이다. 성종이 고려의 국왕 순( ; 현종)이 멋대로 즉위한 것을 문죄하였으나 불복하였다.

통화 말년에 고려가 항복하였다. 개태 3년에 고려의 보주()와 정주()를 설치하고 이곳에 각장( ; 고려 시대에, 지금의 의주와 정평에 두고 거란·여진과 무역하던 장)을 두었다. 동경통군사에 예속되었으며, 주와 군, 그리고 현 하나를 관할하였다 내원현() 처음 요서 지역의 백성을 옮겨 채웠고, 다시 해()와 중국인 700명으로 지키게 하였다. 호구수는 1,000이다. 선주() 정원군()이 설치되어 있으며 자사를 두었다. 개태 3년(1014)에 중국인 호구를 옮겨 설치하였다. 보주에 예속되었다. 회화군()은 하급이며, 자사를 두었다. 개태 3년 설치하였고 보주에 예속되었다.

진주() 봉국군()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의 개모성()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이세적()과 만나 개모성을 공파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발해는 개주()로 고쳤다가 다시 진주로 고쳤으니, 진한()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정읍( ; 아홉집이 나누어 경작하는 토지)이 나란 줄지어 모여있다. 요나라가 조주()에서 백성을 옮겨왔다. 처음에는 장평군()이라 하였는데, 호구수는 2,000이다. 동경유사사에 예속되었으며 관할하는 현은 건안현() 하나이다. 노주() 현덕군()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삼로군()으로 옛 현은 산양()·삼로()·한양()·백암()·상암() 등 다섯이 있었는데 다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300이며, 동경에서 130리 떨어져 있다. 군사 관련업무는 남여진탕하사()에 속해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웅악현() 서쪽으로 바다까지 15리이며, 바닷가에 웅악산()이 있다.。 내원성() 본래 숙여진() 지역으로 통화 연간에 고려를 정벌할 때 연군이 용맹하다고 하여 두 지휘()를 설치하고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군사 관련업무는 동경통군사에 속해있다. 철주() 건무군()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안시현()으로 고구려 때는 안시성()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설인귀가 흰 옷을 올려 놓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는데, 옛 현은 위성()·하단()·창산()·용진() 등 넷이 있었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1,000이며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탕지현() 하나이다. 흥주() 중흥군()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해명현()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성길()·산산()·철산() 등 셋이었는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200이며,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떨어져 있다. 탕주() 본래 한나라 양평현()으로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영봉()·상풍()·백석()·균곡()·가리() 등 다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동경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져 있다.

숭주() 융안군()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장잠현()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숭산()·위수()·녹성()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15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숭신현() 하나이다. 해주() 남해군()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옥저국() 지역이며 고구려 때 비사성()으로 당나라 이세적이 공격하였던 곳이다. 발해는 남경남해부()로 불렀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너비가 9리나 된다.

옥주()·청주()·초주() 등 3주를 관할하였다. 옛 현은 옥저()·취암()·용산()·빈해()·승평()·영천() 등 여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태평() 연간(1021~1031)에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남해성()을 굳게 지켜 1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별부 추장이 모두 사로잡히자 비로소 항복하였다. 그리고나서 반란군을 모두 상경()으로 이주시켜 천료현()을 설치하였다. 택주()의 백성을 옮겨 채웠다. 호구수는 1,500이며, 관할 주는 둘, 관할 현은 하나이다.

임명현() 요주(耀)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초주()이며 옛 현은 초산()·초령()·사천()·첨산()·암연() 등 다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700이며 해주()에 예속되었다. 동북쪽으로 해주에서 20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암연현()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있다. 옛날 평양성이 현 서남쪽에 있다. 동북쪽으로 해주에서 120리 떨어져 있다. 빈주() 유원군()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청주()이며 옛 현은 천청()·신양()·연지()·낭산()·선암() 등 다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해주에 예속되었다. 동남쪽으로 해주에서 120리 떨어져 있다. 녹주() 압록군()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옛 도읍이며 발해는 서경압록부(西)라고 불렀다.

성의 높이는 3길이며 너비는 20리나 된다. 신주()·환주()·풍주()·정주() 등 4주의 일을 관할하였다. 옛 현은 신록()·신화()·검문()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을 두어 거주시켰다. 호구수는 2,000이며,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4주와 2현을 관할하였다. 홍문현() 신향현() 환주() 고구려 때의 수도로 옛 현은 환도()·신향()·기수()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고구려 왕은 여기에 궁궐을 처음 세웠는데 나라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라고 불렀다. 5대손 소( ; 고국원왕)는 진()나라 강제() 건원() 초년에 모용황()에게 패하고 궁실이 불타버렸다. 호구수는 7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따. 서남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풍주() 발해가 반안군()을 설치하였는데 옛 현은 안풍()·발각()·습양()·협석() 등 넷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3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동북쪽으로 210리 떨어져 있다. 정주() 본래 비류왕()의 옛 지역으로 공손강()에게 병합되었다. 발해가 비류군()을 설치하였다. 비류수()가 있다. 호구수는 5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북쪽으로 38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동나현() 본래 한나라 동내현()으로 정주에서 서쪽으로 70리 떨어져 있다. 모주() 본래 발해의 안원부() 지역으로 옛 현은 모화()·숭평() 둘이 있는데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2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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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링a 16-06-05 18:01
   
이거 정독하실분 몇분이나 될런지...
밥밥c 16-06-05 20:01
   
그래도 최소한 일부만 보더라도 일명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죠.

 위내용을 간단하게 보면 요나라 동경요양부안에 한사군인 낙랑군, 현도군과 요수,패수,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본다면 당시의 고려땅에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죠.

 기록상 당시 요나라땅에 있었습니다.
밥밥c 16-06-05 20:59
   
게다가 대진국(발해)는 정사기준 사방 오천리의 영역리였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 주류사학은 이와는 다르게 터무니없이 작게그리죠.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 에게 핍박받아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북쪽의 여러 나라를 병탄하니 영역이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두부국 16-06-05 21:45
   
발해영역이 사방이 5천리라는 기록이 요사말고 구당서에도 나오지 않나요?
밥밥c 16-06-05 22:13
   
요사지리지는 기존의 기록과 딱히 다른부분도, 충돌하는 부분도 없으니 같게 기록되죠.

 그리고 패수는 요수의 지류죠.

 요수에는 여러 물길이 있는데 , 그중 하류에 해당하는 것이죠.

 물론 요나라 동경요양부에 속해있기 때문에 , 고려의 강역에 존재 할 수 없습니다.

 4번째줄  포하,청하,패수 .....




요하(遼河)에서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주필산(駐蹕山)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 정상에서 몇일을 머무르며 돌에 공을 세겼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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