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이병도 관련 이야기가 나와 링크 가서 읽어 보았습니다.
대략적으로 역사를 학문으로 보느냐, 아니면 주관적인 주장으로 보느냐의 관점이 갈등을 가져 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분의 글이 가장 객관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거 같아 퍼왔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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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2015-09-29 16:26:04)(가입:2012-09-13 방문:942)115.136.***.138추천 3/0
좀 열기를 식히고 생각해 보았음 합니다. 100년전 근대적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역사학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유물과 근거에 입각해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역사를 연구한 행위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을 배운 대상이 하필 일본이었고 당연히 식민지배를 하며 조선사 편찬수회와 같은 악의적인 목적의 사관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도구로 근대적 실증사관이 사용되었으니 이 과정에서 한계점과 비판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증사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역사가 조선시대 마냥 문사철 교양의 하나로 사용된 역사가 아닌 사회과학으로 역사를 배우는 우리이기 때문이죠. 100년전 고고학적 발굴도 미미하였고 근대적 사회과학에 입각한 역사연구도 부족한 상황에서 초창기 연구를 진행한 이병도의 연구가 당연히 부족함을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처음 시작한 인물이니 말이죠 당연히 그 부족함과 한계의 이유가 학문적 연구성과 축적이 미미해서임을 감안해야지 일제의 음모가 들어가면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풍납토성은 1997년 공사현장에서 발굴한 유멀이 88올림픽 개최당시 몽촌토성 발굴을 하며 나온 유물보다 많음에 충격을 주어 대대적 발굴로 그것이 백제 왕성임이 들어난 것이죠.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개발로 인해 백제관련 유적이 부족해 1990년대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유적을 100년전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몽촌토성 조차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았다면 발굴이 가능했는지도 미지수였는데 말이죠.
이병도 주장 틀린거 너무 많아요 당연한게 그 사람이 일제시대 사람이고 100년전 이땅에 처음 근대적 사회과학의 방법으로 역사학을 도입했기에 일본인들 아니면 참고할 연구도 없었기 때문이고 일본인의 연구목적이 악의적인것은 물론이고 고고학적 성과도 너무 부족해 허술하고 틀린점이 많습니다. 당연히 100년의 시간이 지나며 이병도의 연구에서 틀린점 한계점이 다양한 한국사학계의 연구성과로 보완된 점도 있고 부정된 점도 있고 증명된 점도 있습니다.
단지 첫 근대적 학문으로 역사를 다룬 그부분만 높게 평가하는 것 뿐이죠. 한국사학계에서 이병도의 학문이 어떤 연관이 있기에 여기에 일제의 음모와 다른 목적으로 일제식민사학의 극복과 민족주의적 역사연구에 매진한 한국사학계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 불편하단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