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저와 논쟁했던 유저가 아니라
다른 다수의 익명 탐문자들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1. 북위와 백제의 전쟁 기사
1) 기술 사서
삼국사기
남제서
건강실록
2) 내용
서기 490년을 전후하여, 총 3차례에 걸쳐 백제가 북위 군사를 크게 궤멸시킴
* 이 시기는 남제(南齊)의 무제부터 명제 제위 초까지에 해당
2. 이 기사를 근거한 주장
백제가 산동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륙백제의 분명한 근거이다
3. 본인의 견해
산동백제는 가능성이 낮다
4. 본인 견해의 근거
1) 이전 상황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기사
- 백제가 고구려 남쪽을 공격한 후 472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 견제를 제의
- 그 비슷한 시기에 물길 역시 사신을 파견해 북위에 같은 제의를 함
- 472년, 북위가 백제에 답방을 하기 위해 육로로 사신을 보냈으나 고구려가 가로막아 가지 못 함
- 475년, 북위가 뱃길로 백제에 사신을 보냈으나 난파됨
- 고구려, 백제 대침공
- 고구려, 거란 일부 부족 응징
- 고구려, 유연과 지두우 분할
- 이 여파로 북위의 동북계 점차 위축
2) 산동지역은 당시 북위 영토였다
① 송서(宋書) 본기 명제 태시(泰始) 2년(466) 기사
"설안도(薛安都)가 삭로(索虜, 북위)를 끌어모으니 장영(張永)과 심유지(沈攸之)가 대패(大敗)하였다. 이로써(이 때에) 마침내 회북(淮北)의 4 개 주와 예주(豫州), 회서(淮西)의 땅을 잃었다."
② 송서 주군지(州郡志)의 徐州(서주), 青州(청주), 兗州(연주) 등이 이 때에 상실돼 교치하였다(失淮北僑立) 한 기록
③ 위서 고구려전 480년 기사의 광주(光州)에서 연(璉, 장수왕)이 소도성(蕭道成, 남제 창업주)에게 보낸 사신 여노(餘奴) 등을 해상(海中)에서 체포하여 대궐로 압송하여 왔다 한 기록/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기술돼 있음
* 광주(光州)는 지금의 산동성 래주시(莱州市) 일대
# 송서 : 462년 유송 효무제 때에 편찬된 앞부분에 487년 남제 무제의 명으로 심약이 그 후대의 역사를 더하여 편찬
# 회수 : 화북과 화남의 경계, 현 淮河(회하, 화이허)
3) 백제의 상황
-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면서 가야 지배력을 상실, 현 전라도 지역에 대한 장악력 강화, 고구려에 부용한 탐라국 복속, 열도 지배 강화
- 북위를 설득해 북위-백제-물길 삼각동맹으로써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좌절되자 유송, 남제 등 남조와의 외교에 주력
- 476년 유송(남송)으로 보낸 사신선이 고구려군에 막혀 가지 못함
- 484년 남제로 보낸 사신선이 고구려군에 막혀 가지 못함
- 이후 절강, 강소 등의 남방 원양 항로로 교류
# 493년, 북위, 평성(平城, 현 대동시)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
5. 정리 및 보유 가설
>>정리
산동 지역은 '북위-백제' 전쟁 당시 이미 북위 땅이었다
>>필자의 보유 가설
유송 시대가 아니라 남제 시대
산동 지역이 아니라 최치원이 언급한 '오-월'에 해당하는 회수 유역
회수 유역에서 산동 방면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백제가 활동했을 가능성으로서의 가설을 보유함
□ 별기
기주
기주는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달랐는데
특히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에는 기주가 여러 곳이었다
유송(남송)은 북위에게 기주를 상실했는데
북위는 유송에게서 빼앗은 기주를 제주로 개명하여 설치함
북위의 기주는 현 하북성 형수시 기주구 일대
유송의 기주(북위의 제주)는 현 산동성 제남시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