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시기 조선과 티격태격하던 여진의 무리들은 주로 조선의 동북방면 6진과 접경하여
조선에 신속하고 의지해서 살아가던 번호(니탕개가 대표적인 인물이지요)들 아니면
여진 부족들 가운데서는 인구와 발전정도가 상대적으로 가장 뒤떨어진 야인여진
( ex:시전부락-노토부락)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선과 접경했던 여진의 일부 무리나 부족이 조선에 신속하거나 제압당했다고 해서
여진 전체의 역량이 조선보다 떨어진다는 논리는.....
당시 일본에서 변방 깡촌에 불과했던 대마도를 통해 투영된 일본의 지극히 일부의 모습만을
가지고 일본 전체의 역량을 무시했던 상황과 똑같은 논리적 오류인 것입니다.
위 본문의 상황은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써... 누르하치에 의해 적어도 건주여진은
통합된 이후이며... 누르하치의 부상을 경계하는 해서여진부족들과 몽골 코르친 부족이
주축이 된 9개 부족 3만연합군까지 격퇴한 이후의 상황으로...
당시 왜란에 시달리던 조선으로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 이후입니다.
아래의 히스토리2님의 댓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건주여진의 중심지인 퍼알라성 일대로
파견되어 누르하치-슈르하치 형제를 만나본 신충일이 기록한 보고서 형식의
'건주기정도기'에 씌여진 내용으로 이미 당시에 누르하치의 군세는 1만5천~2만에 달하던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여진사회에서 수시로 벌어지던 씨족-부족단위의 전투와 수렵으로
단련된 통일된 전투원 1만5천~2만의 전투력은 적어도 농경민들에서 차출된 몇 배 이상의
병력규모의 전투력과 맞먹을 것입니다.
사실상 조선 전기시기를 통틀어 여러차례 여진을 정벌했다는 것도 실상을 보자면
1개 부족 단위도 아닌 그보다 하위인 총인구 수백명~천명 이하 단위인 씨족-부락 단위의
집단 1~2개에서 몇 개집단을 상대로.......조선이 토벌하려는 여진집단 총 인구보다도
훨씬 많은 수천 ~ 수 만대군을 동원한 인해전술로 정벌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누르하치 이전에는 기껏해야 전투원 수 백 명 단위를 상대하던 차원에서
누르하치 이후에는 통일된 1~2만 단위 이상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로 바뀜에 따라
순식간에 선조 이전시기의 신속관계에서 선조-광해군 시기를 거치며 동등한 관계로
[[선조시절까지도 여진족은 조선의 동북 병력에 의해 쥐어터지던 신세였습니다]]
.
.
임란전후의 선조시기에 조선과 접경했던 번호와 야진여진의 일부세력이
조선에게 신속하고 쥐어터졌다고해서....
마치 여진족 전체가 조선에 쥐어터지던 존재로 비약시키시는군요....!!!
당시 조선이 직접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여진세력이란.....
크게는 건주,해서,야인여진으로 나뉘어진 여진세계 전체로 보았을때,
가장 세력이 미약했던 야인여진... 그것도 야인여진 전체가 아닌 몇 분지 일에 불과한...
다시말해 여진세계 전체 면적과 인구와 비교하자면 최대치로 봐서도 1/10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감방친구님의 논리는 대략 200만명의 조선족이 중국의 판도에 있다고해서
남북한-한반도 전체가 중국의 판도에 속한다고 비약시키는 것과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임란 이후의 선조시기 무렵이 되면....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고사하고.....
누르하치에 의해 세력권이 약화되고, 명나라-예허부를 통한 교역로까지 차단되어
송화강~목단강 유역의 본거지를 버리고 간도-함경도 접경지역으로 남하한
해서여진의 한 부족인 부잔타이가 이끄는 '울라부'가 이전까지 조선의 통제하에 있던
야인여진을 침탈함은 물론 조선경내까지 침입하여 수 백명 단위의 조선인들을 살해하고
납치해갔음에도... 이를 저지하지 못함은 물론 이후에 토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정도로... 대략 수천~1만병력 단위로 결집된 여진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일은
그 당시에 이르면 실로 버거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울라부 또한 해서여진 4부 가운데 하나이며, 전체 여진세계에서 보자면
대략 1/10 정도의 인구와 세력권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겁니다.
(참고로 울라는 조선왕조실록에는 홀온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울라부는 누르하치에 의해서 명나라-타여진부족들과와 교역로가 차단당하여
경제적으로는 조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 표면적으로는 광해군시기 조선에 신속하여
직첩을 하사받기도 했지만....)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30일 정유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남부 주부 신충일이 변방 오랑캐의 실정에 대하여 서계를 올리다국역원문 .
1. 다지(多之)가 우리 나라 사람의 용약(勇弱) 여부를 동양재(佟羊才)에게 묻자, 동양재의 말이 ‘만포(滿浦)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나열한 군사가 3∼4백 명이 있었다. 등에는 화살통을 지고 앞에는 활집을 안았는데, 화살은 깃이 떨어지고 활촉이 없으며 활은 앞이 터지고 뒤가 파열되어 타국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무리에게는 궁전(弓箭)을 쓰지 않고 한 자 되는 검(劍)만 가지고도 4∼5백 명을 벨 수 있는데, 오직 팔의 힘에 한계가 있음이 유감일 뿐이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우리 첨사(僉使)가 만일 군사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한병 정졸(悍兵精卒)과 강궁 이촉(强弓利鏃)으로 크게 성세를 떨쳤을 것이다. 양재(羊才)가 본 것은 군병이 아니라 뜰에서 공급하는 사람과 금훤군뢰(禁喧軍牢)029) 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선조29년은 누르하치가 세력이 한창 커지고 있을 때입니다.. 노추는 누르하치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신충일이 '건주기전도기'라는 라는 보고서를 통해 누르하치가 막 웅기하기 전 상황을 적은 글입니다 . 당시 누르하치는 190명의 장수를 거느렸고, 팔기제와 몽골과의 관계에 대해 보고서에 적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은 왜란 중 인지라.....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30일 정유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남부 주부 신충일이 변방 오랑캐의 실정에 대하여 서계를 올리다
남부 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 서계(書啓)를 올렸다.
"신이 지난해 12월 15일 강계(江界)에 이르렀는데, 마침 부사(府使) 허욱(許頊)이 방비를 점검하는 일로 그 경내에 소속된 진보(鎭堡)에 나가 있음으로 인해 본부에 머물러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17일 그가 본관으로 돌아와 드디어 서로 회합, 변방 오랑캐의 실정에 대해 물을 만한 것을 문의한 다음에 반전(盤纏)을 마련하여 20일에 출발하여 21일 만포진(滿浦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향도 호인(嚮導胡人)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날이 저물어지자 이파(梨坡)의 추호(酋胡)인 동녀을고(童女乙古)와 동퍅응고(童愎應古) 등이 나왔습니다. 22일 아침에 전 첨사(僉使) 유염(柳濂)이 회원관(懷遠館)에 나와 있었는데, 두 호인(胡人)을 불러 주식(酒食)을 먹이고 각각 미포(米布)를 준 후, 신은 향통사(鄕通事) 나세홍(羅世弘)과 하세국(河世國) 및 진노(鎭奴) 강수(姜守)와 신노(臣奴) 춘기(春起) 등과 함께 정오에 만포진을 떠나 얼음 위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노추(奴酋)의 집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22일부터 28일까지의 지나온 노정의 일을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1. 노추의 집은 소추(小酋)의 집 북쪽에 있어 남쪽을 향하여 안배되어 있었고, 소추의 집은 노추의 집 남쪽에 있어 북향하여 있었습니다.
1. 외성(外城)의 주위는 겨우 1리이며, 내성의 주위는 2마장쯤 되었습니다.
1. 외성은 먼저 돌로 쌓아 위가 2∼3자의 높이며 또 연목(椽木)을 깔았는데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높이는 10척 가량 되었고 안팎에는 진흙으로 발랐으며, 치첩(雉堞)·사대(射臺)·격대(隔臺)·호자(壕子)는 없었습니다.
1. 외성문(外城門)은 나무 판자로 하였고 자물쇠가 없이 문을 닫은 뒤에는 나무로 건너질렀는데 마치 우리 나라의 장군목(將軍木) 제도와 같았습니다. 위에는 적루(敵樓)를 설치하고 풀로 덮었으며, 내성문은 외성문과 같고 문루(門樓)가 없었습니다.
1. 내성의 축조 역시 외성과 같은데, 원첩(垣堞)과 격대(隔臺)가 동문으로부터 남문을 지나 서문에 이르기까지 있으며, 성위에는 관망하는 판옥(板屋)을 설치하였는데 지붕이 없으며, 사다리를 설치하여 오르내리었습니다.
1. 내성 안에 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그 목책 안에 노추(奴酋)가 살고 있었습니다.
1. 외성 안에는 호가(胡家)가 겨우 3백 채, 내성 안에는 호가가 1백 채, 외성 밑 사면에는 호가가 4백여 채가 되었습니다.
1. 내성 안에는 친근한 족류가 살며, 외성 안에는 모든 장수 및 족당(族黨)이 살고 외성 밑에 사는 자는 모두 군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 외성의 밑바닥은 넓이가 4∼5척 가량 되고 위는 2∼3척 가량 되며, 내성의 밑 바닥은 넓이가 7∼8척 가량 되고 위의 넓이도 같았습니다.
1. 성중에 있는 샘물은 겨우 네댓 곳이었는데, 물줄기가 길지 못하기 때문에 성중 사람들은 시내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실어들이기를 아침 저녁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1. 저녁과 새벽에는 단지 삼통(三通)만 치고 별다른 순경(巡更)027) 이나 좌경(坐更)028) 을 하는 일이 없었으며, 외성문은 닫고 내성문은 닫지 않았습니다.
1. 호인의 목책은 마치 우리 나라의 울타리와 같아 집집마다 목책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견고한 것은 부락마다 서너 곳에 불과하였습니다.
1. 성 위에는 방비하는 어떤 기구도 볼 수 없었습니다.
1. 노추의 성에서 서북쪽으로 중국 무순(撫順)까지와의 거리는 이틀 길이며, 서쪽으로 청하(淸河)까지와의 거리는 하루 길이며, 서남으로 애양(靉陽)까지와의 거리는 사흘 길이며, 남쪽으로 신보(新堡)까지와의 거리는 나흘 길이며, 남쪽으로 압록강까지와의 거리는 하루 길입니다.
1. 28일 미시(未時)에 노추의 집으로 가서 바로 그 목책 안의 객청(客廳)이란 곳에 도착하니 마신(馬臣)·동양재(佟羊才)·왜내(歪乃) 등이 찾아와 신을 보고 노추의 말로 신에게 전하기를 ‘험준한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였다. 그 후의가 실로 근실하므로 사례하여 마지않는다.’ 하고, 이어 ‘문서를 가지고 왔느냐.’고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첨사(僉使)께서 도독(都督)이 차장(次將)을 파견한 데 대해 통사 졸예(通事卒隷)로 경홀히 보사(報謝)할 수 없다 하여 전개(專价)를 달려 회첩(回帖)을 봉해 보냈다. 오는 도중에는 별로 어려운 일이 없었다. 무슨 노고가 있었겠는가.’ 하고 드디어 회첩을 꺼내어 주어 보냈는데, 조금 후에 노추가 중문 밖에 나와 신에게 상견(相見)을 청하므로 신은 노추의 앞에 서고 나세홍(羅世弘)·하세국(河世國)은 신의 좌우에 섰습니다. 조금 후에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예가 끝나자 간략한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마신(馬臣)을 시켜 객청에 와 신을 위문하고 신에게 그대로 객청에서 유숙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 ‘만약 여기에 머물면 모든 오랑캐의 실정을 탐문할 길이 없을 것이다.’고 여겨져서 핑계하여 말하기를 ‘몸에 질병이 많아 온실(溫室)에서 조리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더니 신을 외성 안 동친자합(童親自哈)의 집에 숙소를 정해 주었습니다.
1. 신들이 입성(入城)하던 날 저녁에 마신(馬臣)이 친자흡(親自哈)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말먹이가 밖에 있는데 미처 가져오지 못하여 보내줄 수가 없으니 오늘은 당신이 제공하라.’고 하였습니다.
1. 신이 반전(盤纏)으로 가지고 간 동노구(銅爐口) 2개, 숟가락 20매, 젓가락 20쌍, 종이[紙束], 어물(魚物) 등을 가지고 마신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도중에 혹시 부족할까 염려되어 이 물건을 준비해 왔는데, 지금 별로 소용이 없어 도독에게 바치려 한다. 이 생각이 어떠한가?’ 하니, 마신이 답하기를 ‘해롭지 않은 일이다.’ 하므로, 즉시 마신으로 하여금 노추 형제에게 보내게 하였습니다. 노추의 형제는 이를 받고 몹시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1. 노추의 형제가 마신과 동양재를 보내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게 하고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수시로 요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어육과 술을 계속 보내왔고, 말먹이까지도 계속 보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내(歪乃)는 날마다, 혹은 하루 걸러 찾아와 문안하였습니다.
1. 마신의 본명은 시하(時下)이며, 동양재의 본명은 소시(蘇屎)였는데, 지난해 여 상공(余相公)과 회합하는 일로 만포진에 나와 있을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왜내는 본래 명나라 사람인데 노추의 집에 와서 문서를 관장한다고 하나 문리를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의 사람들도 글을 아는 자가 없었고, 또 글을 배우는 자도 없었습니다.
1. 29일 소추(小酋)의 형제가 신을 청하여 본 후 동양재로 하여금 소략한 주연을 베풀게 하여 신을 위로하였습니다.
1. 병신년 정월 1일 사시(巳時)에 마신과 왜내가 노추의 말을 전해와 연회에 참석하기를 요청하므로, 신이 나세홍·하세국과 함께 가서 참석하였습니다. 노추의 문족(門族) 및 형제 인친(兄弟姻親)과 당통사(唐通事)는 동벽(東壁)에 있고, 몽고(蒙古)의 사할자(沙割者)·홀가(忽可)·과을자(果乙者)·이마거(尼麻車)·제비시(諸憊時)는 북벽(北壁)에 있고, 신들 및 노추의 여족(女族)은 서벽(西壁)에 있고, 노추 형제의 처와 제장(諸將)의 처는 모두 남벽(南壁)의 온돌 밑에 섰는데, 노추의 형제는 남쪽의 동쪽 모퉁이 땅위에서 서북쪽을 향하여 검은 의자에 앉았고 제장은 모두 소추의 뒤에 시립하였습니다. 술이 두어 순배 돈 후에 올라부락(兀剌部落)의 새로 항복한 장수 부자태(夫者太)가 일어나 춤을 추었고, 노추도 문득 의자에서 내려와 비파를 퉁기면서 몸을 흔들었습니다. 춤이 끝나자 광대 8명이 각각 재주를 보였는데 그 재주가 몹시 생소하였습니다.
1. 이날 연회가 시작되기 전 상견할 때에 노추가 마신을 시켜 전언하기를 ‘지금부터 두 나라는 한 나라와 같이 지내고 두 집은 한 집과 같이 지내면서 영원히 우호를 맺어 대대로 변하지 말자.’고 하였는데 마치 우리 나라의 덕담(德談)과 같았습니다.
1. 연회할 때 청외(廳外)에서는 나팔을 불고, 청내(廳內)에서는 비파를 퉁기며 퉁소와 피리를 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빙 둘러서서 창(唱)을 하면서 주흥(酒興)을 돋우었습니다.
1. 제장이 노추에게 잔을 드릴 때에는 모두 이엄(耳掩)을 벗었고 춤을 출 때에도 또한 이엄을 벗었는데 소추(小酋)만은 벗지 않았습니다.
1. 2일 소추가 말 3필을 보내 신들을 청하기에 신들이 그 말을 타고 가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모든 기구가 형의 것과 같지 못함이 너무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날은 곧 국기(國忌)라서 그곳의 형태나 살펴보려고 가기는 하였으나 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소추가 간절히 권하므로 신이 망친(亡親)의 기일(忌日)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 3일 추호(酋胡) 동호라후(童好羅厚)·동망자합(童亡自哈)과 여추(女酋) 초기(椒箕)가 신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노추가 시킨 것이라 하였습니다.
1. 동호라후가 연회를 파할 무렵에 애꾸눈을 한 한 사람을 데리고와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곧 산양회(山羊會)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자다. 산양회 건너편 박시천(朴時川)은 곧 새매를 잡는 곳인데 당신네 나라 사람이 반드시 엿보고 훔쳐간다. 이를 금할 수 없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어느 때 어느 곳 사람이 훔쳐갔는가? 그 사람의 생김새는 어떠하던가? 우리 나라는 법령이 몹시 엄격한데, 누가 감히 지경을 넘어 와 너희들의 물건을 훔치겠는가. 그럴 리가 만무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호라후(好羅厚)의 말이 ‘근자에는 훔쳐간 자가 없다. 만약에 혹시라도 있을 경우 특별히 금지시키라.’고 하였습니다.
1. 4일에 소추가 동양재를 보내 신에게 요청하기를 ‘군관(軍官)이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형을 위해서만이 아니니, 나 역시 당신을 접대해야겠다.’고 하면서 드디어 신을 그의 장수 다지(多之)의 집으로 맞이하였는데 다지는 곧 소추의 사촌형이었습니다. 이어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밤이 되어 파하였습니다.
1. 다지(多之)가 우리 나라 사람의 용약(勇弱) 여부를 동양재(佟羊才)에게 묻자, 동양재의 말이 ‘만포(滿浦)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나열한 군사가 3∼4백 명이 있었다. 등에는 화살통을 지고 앞에는 활집을 안았는데, 화살은 깃이 떨어지고 활촉이 없으며 활은 앞이 터지고 뒤가 파열되어 타국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무리에게는 궁전(弓箭)을 쓰지 않고 한 자 되는 검(劍)만 가지고도 4∼5백 명을 벨 수 있는데, 오직 팔의 힘에 한계가 있음이 유감일 뿐이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우리 첨사(僉使)가 만일 군사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였다면 마땅히 한병 정졸(悍兵精卒)과 강궁 이촉(强弓利鏃)으로 크게 성세를 떨쳤을 것이다. 양재(羊才)가 본 것은 군병이 아니라 뜰에서 공급하는 사람과 금훤군뢰(禁喧軍牢)029) 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1. 다지가 말하기를 ‘우리의 왕자(王子)가 당신네 나라와 일가(一家)를 맺고자 하기 때문에 포로가 된 당신네 나라 사람을 후하게 전매(轉賣)하여 다수를 쇄환(刷還)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왕자는 당신의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당신의 나라는 채삼(採蔘)하는 우리측 사람을 많이 죽였다. 채삼하는 것이 무슨 피해가 있길래 이처럼 살상하였는가. 정의가 몹시 박하여 깊이 원한과 유감을 품고 있다.’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법에 호인(胡人)이 무단히 우리의 국경에 잠입하면 이를 적호(賊胡)로 논죄한다. 하물며 너희 나라 사람이 어두운 밤이면 수백 년 동안 오지 않던 땅에 난입하여 우마(牛馬)를 약탈하고 인민을 살해하는 데이겠는가. 산골짜기에 사는 우매한 백성들이 황급히 놀라 스스로 서로 짐승잡듯 마구 죽이게 된 것이니, 사세가 반드시 이렇게 만든 것이지 하나의 풀[草]030) 때문만은 아니다. 대개 우리 나라가 오랑캐를 접대하는 도리는 성심으로 복종해 오는 자에게는 어루만져 도와주고 부드럽게 감싸주지만, 금지된 국경을 함부로 침범하는 자에는 일체 적호(賊胡)로 논죄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 지난 무자년 간에 너희 나라 지방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자가 도로에 널렸었다. 그리하여 너희 무리가 귀순하면서 만포(滿浦)에 먹이를 구하는 자가 날마다 수천으로 헤아릴 정도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각각 주식(酒食)으로 먹여주고 또 쌀과 소금을 지급함으로써 이를 힘입어 살아난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우리 나라가 애초부터 너희 무리를 죽이는 데에 뜻을 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무리가 함부로 국경을 넘어 와 스스로 죽음에 나아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지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원(渭源)의 관병(管兵)을 무슨 연유로 면직시키고 치죄(治罪)하였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위원의 관병관(管兵官)이 죄를 입은 것은 유독 너희의 무리를 죽여서만이 아니다. 변방의 관병관은 순찰하며 멀리 관망하는 것이 그의 본직인데, 그가 순찰하며 멀리 관망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음으로 너희 무리가 우리의 국경에 난입하여 인민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 갔다. 그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 이것이 결국 면직하고 치죄하게 된 원인이다. 만약 너희들이 우리 나라 국경에 이를 때 멀리 살펴 엄히 경계하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면 우리의 백성과 너희들이 모두 함께 짐승처럼 마구 죽이는 환란은 없었을 것이다.’ 하니, 다지는 다시 할 말이 없어 엉뚱한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1. 동양재(佟羊才)의 말이 ‘당신네 나라는 연회를 베풀 때 왜 한 사람도 비단옷을 입는 자가 없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의장(衣章)은 귀천(貴賤)을 분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군민(軍民)은 감히 비단옷을 입지 못한다. 어찌 너희 나라의 상하가 같이 입는 것과 같겠는가.’ 하니, 양재는 말이 없었습니다.
1. 다지(多之)가 신에게 묻기를 ‘당신네 나라에 비장(飛將) 두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두 사람 뿐만이 아니다. 남변(南邊)에 있는 자는 많지만 여기에 온 자는 두 사람이니, 하나는 벽동 군수(碧潼郡守)이며 하나는 영원 군수(寧遠郡守)이다. 남녀의 왜적(倭賊)을 이미 다 구축하였기 때문에 그 비장들이 머지 않아 이곳에 와 방비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다지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능히 난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듣고자 한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두 손에 각각 80여 근의 장검(長劍)을 들고 말을 달려 절벽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조그마한 창문을 빠져나가는 데도 걸리지 않으며, 혹은 큰 내를 뛰어 넘기도 하며, 혹은 나뭇가지 위로 왕래하기를 평지를 밟듯이 하며, 혹은 며칠 길을 하룻밤 사이에 능히 왕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지의 말이 ‘몇 보나 되는 넓이의 시내를 건너뛸 수 있느냐?’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파저강(波猪江)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니, 다지는 좌우를 돌아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