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 -삼국사기 영양왕 본기
번역-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左十二軍 出等道 右十二軍 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等道 絡繹引途 摠集平壤
-삼국사기 영양왕 본기
번역-우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 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以刑部尙書張亮 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硤兵四萬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艘 自東萊州泛海 趣平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帥步騎六萬 及蘭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遣行軍摠管姜行本少監丘行淹 先督衆士 造梯衝於安蘿山 時 遠近勇士應募 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 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 仁愛其民 以思亂之軍 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 於是 凡頓舍供備之具 减者太半 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 分道擊之-삼국사기 보장왕 본기
번역-11월, 황제가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전 의주자사(宜州刺史) 정천숙(鄭天璹)은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황제는 그가 이전에 수(隋) 양제(煬帝)를 따라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하여, 그를 황제가 있는 곳으로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많으며, 동이(東夷) 사람들은 성을 잘 수비하기 때문에 빠른 시기에 함락시킬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수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의견을 따르라.”
황제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강(江)ㆍ회(淮)ㆍ영(嶺)ㆍ협(硤)의 병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및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동래주(東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태자첨사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에서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대거 집결하게 하였다. 황제는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에게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사다리와 성을 공격하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멀고 가깝고 할 것 없이 모집에 호응하는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장비를 바치는 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황제가 이 전투 장비들을 직접 살피고 그 중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또 친필로 천하에 조서를 내려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지를 돌아서 요동과 갈석(碣石)에서 죄를 물을 것이니, 행군 도중에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또 이어서 말했다.
“이전에 수나라의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고구려의 왕은 백성들에게 어질었으며 그들을 사랑하였다. 이처럼 반란을 도모하는 군대를 거느려 평화로운 무리를 공격한 격이었으므로 수나라의 양제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이치가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이요,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요, 셋째는 정돈된 나라로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요, 넷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기쁨으로 충만한 군사로 원한에 쌓인 군사와 맞서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이라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에 모든 숙소와 공급 및 설비에 따르는 도구를 절반이나 삭감하였다. 모든 군단과 신라ㆍ백제ㆍ해ㆍ거란 등에 조서를 내려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통전
번역-지금(당대)북평 남쪽 20여리는 고려 땅인데 그곳에 좌갈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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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통전 모두 공통적으로 현 산해관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갈석산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네요.
당대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서계가 난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其地,東至新羅,西渡遼水二千里,南接百濟,北鄰靺鞨千餘裏。治平壤城。其城,東西六裏,南臨浿水。 -북주서
고구려 영토는 동으로 신라에 닿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2천리이고 남으로 백제에 접하고 북으로 말갈과 천여리 거리이다. 왕은 평양성에 있는데 동서 6리이고 남쪽으로 패수에 접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