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있는것에서 한국과의 연을 느낍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천황은 남계(부계)로 이어지는데, 천년 이상전의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 해서 (무령왕의 10대후손인가 그렇습니다.) 그걸로 천황이 백제혈통이 되는게 아니지요.
본인입으로 자신이 백제계 혹은 백제혈통이라 말한것도 아니지요. 저내용 말한게.
일본이라는 말이 백제 입장에서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이었지..
즉, 일본이라는 국호는 왜구놈들의 입장에서 자신을 부른 게 아니라
다른 나라(백제)가 동쪽을 가리키는 말로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 왜는 왜라는 말대신 일본이라고 불러달라고 고려, 조선, 명에게 빌다시피했지..
그럼에도불구하고 고려, 조선, 명은 왜를 왜라고 불렀고.
천황이란 단어는 일본외에 전세계 어디에도 쓰지않는말. 지들끼리 정신승리해서 쓰는말을 우리가 왜 써줘야하지? 우리나라 공식표기도 일왕이고. 한국어로 천황이 아니고 한국의 표기로는 일왕이야. 이건 상식이 있어야 뭔 말을 하지. 배우려면 제대로 배우고 싸가지없는 말투가 꼭 왜놈이다 너. 에라이 아베스런놈아.
663년 9월 7일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다. ‘일본서기’는 백제인들의 탄식을 이렇게 전한다. “국인(國人)들이 서로 말했다. 주유(주류성을 의미)가 항복했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백제는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한중일 삼국 동아시아 세계의 원형의 틀이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다. 백제 통합의 중요 걸림돌인 왜가 한반도에서 밀려났고, 신라는 삼국통일에 한 걸음 다가섰다.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의 권고로 왜국은 국호를 일본으로 바꿨다.
사마왕이 준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는 하치만 동경과 같은 기록에서 게이타이의 한자가 '남제'로 되어있다던가 하는 것으로 도중에 일왕계가 백제왕의 동생으로 교체되었다 하는 가설이 있기도 합니다만 문자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 말고도 이와 유사한 식의 가설이 꽤나 많습니다만, 가설 단계에서 그치는게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왕계가 '백제계'라고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고대 일본 자체를 파악하기도 힘든데 일왕계 추적도 다를게 없거든요.
다만 그것과 별개로 일왕계가 어느 특정 국가에서 왔다고는 보기 어려워도, 도래인일 가능성은 고고학적으로나 정세로나 전설속의 묘사를 볼때나 꽤나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설입니다.
그가 바로 백제대사를 지낸 조메이 일왕이다. 639년 그는 야마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을 백제천이라 명명하고 서쪽의 백성들에게는 궁을, 동쪽의 백성들에겐 절을 짓게 하였다. 640년 10월, 백제인 서직현이 조영을 책임졌던 백제궁이 완성된다. 거처를 옮긴 조메이 일왕은 이듬해 겨울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조정에서는 궁 북쪽에 빈궁을 지어 죽음을 애도했다. 사람들은 이 궁을 백제의 대빈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한상은 이듬해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 정지산 유적을 빈전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일부 회의론도 있었지만 학계 다수는 이를 지지했고, 정지산 유적은 2006년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특히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후쿠오카(福岡)대 교수 등 일본 학계의 관심이 뜨거웠다. 정지산 유적에서 기와건물터와 함께 발굴된 대벽(大)건물터가 일본의 그것과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대벽건물터는 사각형으로 도랑을 판 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을 세운 것이다. 이한상은 “정지산 유적의 대벽건물터는 시신이 안치된 기와건물터와 품(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어 다분히 기획성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
고고학계는 정지산 유적이 삼국시대 빈전을 확인한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 궁궐 안 빈전에서 5∼7일만 장례를 거행한 중국과 달리 3년상을 치른 고대 한반도의 장의 풍습을 고고 자료로 실증했다는 것이다. 3년상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졌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조메이(舒明) 천황이 죽은 뒤 ‘백제대빈(百濟大殯·백제의 3년상)’을 따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와 일본 왕실이 상장의례를 공유한 것은 양국 문화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정지산 유적 발굴은 대벽건물터가 일본으로 전파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설명했다.
현 일본 왕실의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2004년 8월 무령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몸소 충남 공주를 찾은 바 있다.
왕자는 직접 가져온 1300년 전 일본 왕실에서 만든 왕실 제사용 향로(香爐)와 귀중한 향(香)을 무령왕릉(武寧王陵) 안에서 피우며 제주(祭酒)와 제사용 과자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머리 숙여 참배했다.
그러나 일본의 어떤 매체에서도 아사카노미야 왕자의 무령왕릉 참배를 보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