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05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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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수서隋書』 동이전東夷傳 고구려 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취희聚戲─왕의 입수─수석전水石戰’의 순서로 전개된 신년제新年祭의 한 과정이었다.한편 제의의 일환으로 행해진 석전과는 달리 전투적 목적과 관련된 석전도 있었던 것이 기록을 통해 드러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 「신라본기新羅本紀」 남해차차웅 11년 조에는 실전에 대비한 석퇴石堆가 등장하고, 권40 직관지職官志 무관武官 조에는 법당감法幢監 중에 석투당石投幢이 있으며, 법당화척군法幢火尺軍 중에도 역시 석투당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 미루어서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제의적인 석전과 군사 훈련 또는 실전으로서의 석전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려시대의 석전에 관한 기록 역시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고려사高麗史』 권81에 나온 기록으로서 정규 전투 부대로서 석투군石投軍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우辛禑 조 등에 나타나는 석전 기록이다. 앞의 경우, 투석投石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별도의 조직을 갖고 있었던 만큼 실전 연습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신우 관련 기록에 나타나는 석전은 무뢰한無賴之徒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하는 싸움으로서, 비록 왕의 관희觀戲 대상이긴 해도 일부 지배층들에 의해 폄하된 단오의 국속國俗이었다.조선시대의 기록도 고려시대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선 석전에 대한 지배층의 입장이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421년(세종 3)의 기록을 보면 상왕인 태종이 석전을 몹시 좋아하여 세종과 함께 관람하길 원했지만, 세종은 석전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관람을 사양했다. 이에 태종은 석전이 ‘재미삼아 하는 놀이[戲事]’가 아니라 ‘군사 기술[武才]’이라고 하면서 세종을 설득하여 함께 석전을 관람한 바 있다. 한편 조선시대의 석전은 군사적 목적으로 연행된 것을 제외하고는 일정하게 주술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성민洪聖民(1536∼1594)이 남긴 경주부의 석전 기록을 보면 한 해의 길흉을 점치기 위해 석전을 벌이는 모습이 드러나는데(『졸옹집拙翁集』 권6), 이처럼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를 통해서 점세占歲하는 관행은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조선 전기까지의 기록을 통해 도성에서 석전이 전승되었고, 상반된 관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지만 지방의 석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기록들을 보면 많은 지역에서 석전이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앞서 살펴본 경주부의 석전과 『영가지永嘉誌』에 소개된 안동부의 석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김해부의 석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에 소개된 만리현의 석전 등이다. 이들 석전은 조선 전기까지 도성에서 벌어진 석전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연행의 시기가 김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대보름이고, 승부의 결과를 두고 그 해의 길흉을 점치는 점세적 성격이 뚜렷해졌다. 이와 같은 석전은 조선 후기는 물론 일제강점기까지도 전승되었지만, 그 뒤로 전승이 중단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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