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최전성기 영역
주지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에 관한 가장 오랜 한국의 기록은 “帝王韻紀(제왕운기)”와 “삼국유사”인데 그 내용이 疏略(소략)하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부터 살펴 보는것이 순서 일 것이다.
우선 “삼국유사”의 編次(편차)를 보면 卷(권) 1 의 “奇異(기이)”편에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항목을 설정하고 있는데, 고조선에는 王儉(왕검)조선이라고 주석하여 놓았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왕검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호칭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세칭 檀君朝鮮(단군조선)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편차에서 필자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古朝鮮(고조선)은 王儉朝鮮(왕검조선) 또는 檀君朝鮮(단군조선)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衛滿朝鮮(위만조선)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흔히 고조선 속에 단군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까지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일연의 역사의식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토착의 정치세력 이었던 단군조선과 중국으로부터의 망명객에 의하여 수립된 위만조선, 읍제국가의 성격을 지녔던 단군조선과 영역국가의 성격을 지녔던 위만조선을 그 시대적 성격을 도외시 하고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묶어서 처리하여도 좋을지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로, 箕子(기자)에 대해서는 독립된 항목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연이 한국사의 전개를 고조선(단군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기자가 한국사의 주류를 이루는 맥락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일연이 고조선과 위만조선 사이에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했다면 기자조선이라는 항목이 고조선 다음에 설정되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혹자는 고조선편에 기자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들어 일연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주장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선 “삼국유사”에 실린 기자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古記(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唐高(堯)(당고, 요)가 즉위한지 50년인 康寅(강인) [당고의 즉위 원년은 戊辰(무신)인즉 50년은 丁巳(정사)요 강인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에 평양성[지금의 西京(서경)]에 도읍하고 비로서 朝鮮(조선)이라 일컫고, 또 白岳山阿斯達(백악산아사달)에 옮기어 도읍하였는데 그곳을 또 弓(궁) [혹은 方字(방자)로 됨]忽山(궁홀산) 또는 今彌達(금미달)이라고도 하니 治國(치국)하기 1500년 이었다. 西周(서주)의 虎王(호왕)이 己卯(기묘)에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藏唐京(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가 숨어서 山神(산신)이 되니 壽(수)가 1천 9백 8세이었다 한다
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후에도 고조선은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기었을 뿐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이 고조선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기자가 봉해진 조선은 고조선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사를 받게 된다. 만일 기자가 고조선 전지역의 통치자로 군림 하였다면 고조선이 계속해서 존재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남하 연안에는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은 이 지역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은 다음에 자세히 논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일연은 기자를 고조선의 뒤를 이은 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그가 “삼국유사”“고조선”편에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을 언급한 것은 고조선이 백악산아사달(궁홀산 또는 금미달)로부터 장당경으로 천도한 사유를 밝히기 위함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것과 고조선이 장당경으로 천도한 것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