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임팔전투 못지않게 치욕스러운 패전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1637년 1월 2일 경기도 광주시 쌍령에서 일어난 전투다.
청 태종이 형제 대신 군신 관계로 대우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거부되자 12만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길목을 차단당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원하려고 경상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군사 약 4만 명을 이끌고 출전한다.
허완과 민영 부대는 쌍령 양쪽에 진을 치고 나무 울타리를 세워놓고 청병 공격에 대비했다.
전투는 왼쪽 저지대를 맡은 허완 부대에서 먼저 시작한다.
청군은 곤지암 일대를 점령하고서 조선군 동태를 살피려고 기마병 33명을 보냈다가 충돌한 것이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청군이 사정권에 진입했을 때 사격을 했으면 완전히 소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관 출신 지휘관이 겁에 질린 듯 갑자기 공격 명령을 내려 자중지란을 겪는다.
소총수들이 난사하면서 준비해온 탄약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조선군은 탄약을 받으려고 허둥지둥했고, 멀찍이 떨어진 청군은 이를 눈치채고 곧바로 반격했다.
조선군은 전투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앞다퉈 달아나느라 서로 밟고 밟혀 죽어 시체가 산을 이뤘다.
심리적 공황이 극심한 탓에 일등포수조차 총 한 발 쏘지 못해 방어선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우측 능선에 주둔한 민영 부대도 대참사를 당한다.
조총 불꽃이 화약통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수십 명이 죽은 게 화근이었다.
폭음에 놀란 조선군이 우왕좌왕할 때 팔기군 300여 명이 급습해왔다.
조선군은 총과 칼, 활을 모두 버리고 도망치려다 줄줄이 압사하거나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
사방에서 추적해온 청군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는 병사도 부지기수였다.
쌍령전투에서 조선군 약 1만 명이 사망하고 8천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여주 인근에 대기하던 경상감사 심연은 쌍령 패전 소식을 듣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인조는 최대 병력을 보유한 경상도 근왕군이 맥없이 무너지고 왕자들이 피신한 강화도가 함락했다는 소식에 결국 투항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지 47일 만에 성 밖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큰절하는 치욕을 겪은 것이다.
쌍령전투 청군이 300명이라는 숫자를 놓고 논란이 있다.
부대 편제 등을 보면 3천~7천500명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 숫자를 인정하더라도 쌍령전투는 치욕스러운 패전이다.
지휘관 무능과 병사 훈련 부족 등이 복합 패인이다.
인조반정과 이괄 난 등 지배층 권력투쟁에 실망한 백성의 전투 의지 상실도 큰 요인이다.
누가 왕이 되든지 무슨 상관이냐고 자조하던 상황에서 병사들이 목숨을 아끼는 것은 당연지사다.
임진왜란 칠전량전투도 어처구니없는 패전이다.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완패해 거북선 3척과 판옥선 90여 척을 잃었다.
그나마 부하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갖고 도주한 덕에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