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십사년에 발발한 청병의 입관(入冠), 즉 병자호란때에 청병이 대거남한산성을 공위하여 사십오일만에 구화해위한 고사에 관련시켜, 그 당시 청국은 구화조건의 일로서 조선에 대하여, 그 요구가 잇는 즉시로, 대유인(大乳人) 삼천인과 빈마삼천필을, 영고탑에 입송하라는 요구를 하엿음으로, 북변연군에 거주하는 여진유족으로서 이 요구에 응할 계획을 수립한후, 이를 보호하엿고, 현금(現今), 북변연군에 반거하여 일종특수부락을 형성하고잇는, 재가승의 유미(由未)가 여긔서 발족하엿다고 전하는 자가잇다고 하엿다.-동아일보 1935. 12. 03
"신의 외아들 장선징의 처가 병자호란 때에 잡혀갔다가 속환되여 지금은 친정에 있습니다. 예전처럼 부부로서 함께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인조 16년 신풍부원군 장유
'신이 전에 심양에 갈 때 가족을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양반 가문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부둥켜안고 통곡하니,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돈이 부족해 속환하러 가지못한 부모나 남편들도 차차 가서 속환할 터인데, 만일 이혼해도 된다는 명을 내리면 분명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는 수많은 부녀자를 영원히 다른 나라의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명의 남편은 바란 대로 되겠지만 수많은 집안에서 원망을 품을 것이니 화기를 상하게 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정황을 참작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혼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좌의정 최명길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미모가 매우 빼어난 처녀 하나를 끌고 갔는데,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해 땅에 묻어주고 떠났습니다. 또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처녀 한 사람을 약속한 값을 치르고 속환하기로 돼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어기고 값을 더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결국 여인의 시체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이 두여인이 제때 속환됐더라면 분명 자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지조를 지켰다 한들 누가 또 알아주겠습니까. 이로 본다면 급박한 전쟁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겠습니까. 잡혀간 부녀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이렇게 일률적으로 주장해서 안 됩니다.'
전쟁이 끝난뒤 인조는 청나라에 포로 송환을 적극 요청했지만, 포로를 인적 자원으로 인식한 청나라는 속환가를 받아내려 했다. 조선 정부의 송환 노력은 주로 종실, 신료의 가족,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의 가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빨리 송환하기 위해 몇 배의 웃돈을 지급하기도 했다. 결국 속환가가 올라가면서 실제로는 고위 관료층이나 일부 부유층만이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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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년(1627)의 난 때 의주가 함락되자 최효일이 남쪽의 문루에 뛰어 올라가 큰 칼을 휘두르면서 추격해 오는 오랑캐 수십 명을 연달아 베었다. (청 태조의) 둘째 왕자였던 퉁개불이 이를 보고 장하다고 여겨 강홍립으로 하여금 황기(黃旗)로 불러들여 의주의 임시 태수로 삼게 하였다. 병자년(1636)의 난 이후에 (최효일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서 우리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기약하였는데, 일이 박각되어 가족이 몰살당하였다. 숭정 갑신년(1644)에 청나라 사람들이 북경에 들어와서 천하 사람들의 머리를 깍았지만 최효일만은 깍지 않고 있다가 열황제의 빈소 앞에서 죽으니, 중원의 선비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한다. 만일 최효일이 의주의 임시 태수로 죽었더라면 그저 일개 항복한 포로일 뿐이니, 강홍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최효일은 선조~인조 때의 무관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에 임경업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삼전도에서 조정이 청나라에 항복한이후, 복수심을 품고 명나라의 영원으로 건너가 오삼계와 함께 청나라를 습격하려는 모의를 했었지만, 오삼계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결국 실패하고 자신은 숭정제의 빈소 앞에서 10일간 통곡하며 단식을 하다가 기력을 다해 죽고 말았다. 조선에서는 최효일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려줬으며, 영조와 정조 때에는 그 후손을 찾아 벼슬을 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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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청 나라는 정복지 피지배 인구가 지나치게 많았던 왕조다.
고려와 조선에서 잡아간 포로는 노예로 삼기위한 이유가 아닌것.
상식적으로 원, 청 국내의 기형적인 계층민족간 인구 불균형을 더 악화시킬 하층민 계급은 필요가 없다.
실제 원, 청 내에서 한족 인구를 줄이기 위해 엄청나게 죽였었다.
퉁개불이 최효일을 소속시킨 황기란 청의 군사편제인 팔기군을 말한다.
청이 조선에서 잡아간 포로들은 조선의 국력약화 혹은 만주족의 군사력 증강을 위한 것으로,
청이 이들에게 원한건 천민이 아닌 백성이 되기을 원했다는것이된다.
만주, 몽골 기반 부족들은 우리 고대왕조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이었다.
그건 우리가 (고)조선과 고구려의 정통을 잇고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이 학살하고 탄압한 한족과 몽골이 멸망시킨 나라들에 비교하면 이들의 고려와 조선에 대한 태도는 일반적인 타국과 타민족에 대했던 사례와 맞지않는다.
반도사관으로는 우리역사를 설명할수 없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