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에는 추모왕(鄒牟王)이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고 하였는데.....
오녀산성이 이 때에 쌓았다는 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되어 있지 않다."
특징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축성법인 굽도리식축조공법이 이용되었다는 점과 고식(古式)의 옹성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발굴로 모두 5기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제1기층은 신석기시대 후기 ~ 청동기시대, 제2기는 초기철기시대 이전, 제3기는 고구려초기, 제4기는 고구려 중기, 제5기는 금대 문화층에 각기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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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의 때를 씻지 못하는 역사계는 제발 (엉텅리) 근거부족한 비정은 하지 말아줬으면...일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맞나보다 하잖아요...
그 산성가는 길은 한번 보셨나요? 비좁은 통로로 지나가는...가는 길 (통로)는 둘째 치고, 지금도 그 산성 가는길도 쉽지 않다고 하던데...과연 2천보다 더 오래 전에는 얼마나 험난했을까요..(방어하기엔 좋겠네..)
고주몽이 아무리 머리에 돌덩이를 넣고 다녔어도 저런데에 왕성이라고 짓지는 않았을 듯...크기도 마당만한 산꼭대기(해발 800m)에...(크기도 적당하고 물도 마르지 않은 천지도 있다고 하니 숨어 살기엔 딱 좋은 장소인듯...)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漢書志云 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高句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 高句麗是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 歷四十年 孺留王二十二年 移都國內城-삼국사기
번역-『통전(通典)』에는 “주몽(朱蒙)이 한(漢)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동남방으로 나와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고(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 듯하다.
『한서지(漢書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 3천6백 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써 무려(無慮)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때는 그 아래쪽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 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써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孺留王) 22년(서기 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