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공손씨 정권
중국이 난세로 혼란한 틈을 타서 요동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중국 동부의 이민족을 관리했다. 왕을 칭하기도 하고 거의 왕 같은 권력을 누렸으나 결국 위나라 사마의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같은 공손씨지만, 후한 말에 유주를 중심으로 할거했던 공손찬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요동에는 '제후의 후손'이라는 뜻의 '공손(公孫)' 성씨를 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공손도를 양자 취급했던 집안도 공손씨이고, 공손도를 벼락출세한 놈 취급하고 공손강을 하인처럼 부렸던 것도 공손씨인 공손소이다. 물론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된 다음에는 공손소의 목을 날려버렸다.
한국사에도 엮여있는데, 요동군뿐 아니라 그보다 동쪽에 있는 현도군, 낙랑군의 명목상의 종주권자였다. 변방인 낙랑에 고구려가 침입하고 인구가 대거 삼한으로 남하하는 등 쇠퇴의 징후가 보이자, 보다 남쪽에 있던 낙랑군의 대방현 외 6개 현을 분리해 대방군을 신설하였다. 고구려와 선비족에 대항해 공손도의 종가 딸(宗女)과 부여 위구태왕 사이에 혼인동맹을 맺기도 한다.
요동 공손씨 세력을 고구려나 위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선비족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거나, 오히려 유화 정책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때, 한화(漢化)한 선비족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진위는 불명이다. 공손씨 일족이 몰살된 후, 요동은 선비족 모용외가 장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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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도
후한 말 요동 공손씨 정권의 첫째 수장. 자는 승제(升濟) 또는 숙제(叔濟).[2] 유주 요동군 양평현 사람. 본명은 공손표(公孫豹), 개명(改名)이 공손도.
그의 부친 공손연(公孫延)[3]은 관리의 추적을 피해서 현도군으로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현도군 태수 공손역(公孫琙) 아래에서 일했는데, 공교롭게도 공손역의 18세에 요절한 아들 이름이 공손도의 원래 이름이었던 공손표였고, 공손도는 공손표와 태어난 해가 같았다. 이 때문에 공손역은 공손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해 좋은 혼처를 얻어 장가를 가도록 도와줬고, 스승을 붙여주며 생업에 매진할 필요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169년에는 사필이 유도(有道)[4]로 천거해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렇게 점차 관직이 올라가 기주자사까지 승진했지만 뜬소문이 돌아 면직되었다. 이후 189년에 동탁의 수하 장수였던 서영이 공손도와 동향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추천을 받아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