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가 서울에 있을때 하루는 전라도의 농민들이 달려와 호소 했다.
그들이 흥영군 이우왕자에게 호소한 것은 일본군이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채면서도 보상을 안해준다는 것이다.이에 이우는
"내가 해결하겠다"면서 즉각 서울 용산의 일본군사령부로 달려갔다.
그리고 흥영군 이우왕자는 당시 도로담당을 담당하던 일본군장군을 만나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청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즉시 권총을 빼내어 장군의
머리에 겨누며 "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즉시
죽여주마"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이러한 흥영군 이우왕자 덕분에 곧 농민들의
청원은 이루어졌고 이우는 상관에 대한 항명에도 불구하고 무사했다.
흥영군 이우
(의친왕의 차남 이우)
1912년 출생 - 1945년 사망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일본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아버지 의친왕의 기개를 닮았으며 총명하고 수려한 외모에 왕족으로서의 위엄이
있었다.
흥영군은 조선인에게는 따뜻하고 너그러웠으나 일본인에게는 사납고 냉정하였고
"호랑이 같은 조선 왕족의 핵심"으로 불리며 일본의 감시,경계 대상이었다.
흥영군 이우왕자
일본이 일본 왕족과 강제로 결혼시켜려 하자,이우 왕자는
"일본인과 결혼할 수 없다"며 버텼다.
독립운동가 유동렬의 딸과 정혼했지만 결국 일제의 반대로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고종은"황실의 기상을 드높였다"며 크게 친찬했다고 한다.
왜구들 사이에서도 빛이나는 이우왕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그는 일본인 급우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켜
일제의 요주 감시 대상이였다.
일본에서도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거의 사용하였으며
조선 출신 생도에게는 조선말로 크게 호령하였다고 한다.
술자리에서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황성 옛터"를 부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또한 일본군 정보 창모라는 직위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독립군에게 넘겨주는 등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고 한다.
왕자는 1940년 육군대학 54기를 졸업하는 것으로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942년 소좌로 진급한 황족으로서 선봉에 서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중국 산서성의 수도인 태원을 전출되었다.
이후 북지방면군 제 1사령부 정보참모로 근무하며 중좌까지 진급하였다.
왕자는 중국 태원에서의 근무 3년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왕자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다.
이에 왕자는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운현궁으로 들어가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한다.
그러다 결국 설득 끝에 히로시마로 가게 되는데
왕자가 히로시마에 간 그날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부상을 입는다.
이우 왕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상태가 호전되는 듯 하였는데
그날 밤 갑작스레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후에 왕자의 시신은 조용히 귀국하여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다.
공교롭게도 그의 장례식날에 일왕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하니
바로 그날이 8월 15일이며 왕자는 죽어서야 그토록 열망하였던 조국의 해방을 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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