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단에서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미천왕에 의해 요서로 교치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장의 근거로 삼는 기록은 바로 『자치통감』의 기록인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資治通鑑』卷八十八, 晉紀十
요동의 장통이 낙랑‧대방 2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였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해결이 되지 않았다. 낙랑군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다.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즉 갱단의 주장은 낙랑군의 왕준이 백성 1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복속됐고, 모용외가 낙랑을 요서에 교치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1. 배를 타고 갔다는 기록이 없다.
평양에서 요서로 가려면 배를 타고 이동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배를 탔다는 기록은 커녕 '배'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배를 타고 갔다는 기록이 생략됐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 모용선비에게 귀부할 이유가 없다.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뭐하러 요서의 모용외에게 귀부할까요? 갱단의 주장대로 배를 타고 해로로 간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다면 평양에서 요서로 가는 것보다 바로 옆의 산동반도로 가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게다가 같은 한(漢)족이란 말이지요.
뭣하러 같은 민족도 아닌 다른 민족에게 배를 타고 저 멀리 요서까지 간단 말입니까?
3.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위 기록을 잘 보십시오. 1000여 家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000家면 한 가구 당 5명이라고 했을 때는 5000명, 10명이라고 하면 10000명이 되는 숫자입니다.
그 많은 숫자를 바다를 건너 배로 ... 같은 민족도 아닌 다른 민족에게 저 멀리 요서까지 간다?
선박도 엄청 많이 들텐데?
게다가 모용외와 낙랑군이 있었다는 평양 가운데에는 고구려가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육로로 간다면 당연히 xx행위이고
해로로 간다면 고구려 수군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당시의 항해술은 해안가를 따라서 가는 연안항해입니다.
< 바로 아랫글에 좋은 지도가 있군요 >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2175
정말로 낙랑군이 그 많은 위험을 껴앉고 저 멀리 요서로 갔다고 생각한다면..
갱단들 머릿속에는 뇌가 아니라 우동사리가 들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낙랑군교치설은 애초에 말도 안되는 한사군한반도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 만든 프로파간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