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유는 요수의 시원지에 대해서 지석산과 갈석산을 들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착오일게 분명한데 지석산은 아직까지 고증되지 못한 상태에 있으나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昌黎(창려)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갈석산은 고대 중국의 동북부 변경에 위치했던 산의 명칭으로 자주 문헌에 등장한다.
그런데 갈석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강으로는 지금의 난하밖에 없다. 갈석산은 발해의 해안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2십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므로 바다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요수의 시원지가 될수는 없겠지만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켰을 것으로 본다면 고유가 주석한 요수는 난하일 것으로 상정된다. 요수의 흐름 방향에 대해서 고유는 말하기를 “ 塞(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흐른다” 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의 난하 하류의 흐름 방향과 일치 하는 것이다
2.
춘추시대로부터 서한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요수의 위치를 확인할수 있는 보다 더 분명한 기록이 “說苑(설원)”에 보인다. “ 설원” “辨物(변물)”편에는 춘추시대에 齊國(제국)의 桓公(환공)이 貫中(관중)과 함께 孤竹國(고죽국)을 침공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그들은 고죽국에 이르기 전에 卑耳(비이)라는 계곡을 10리쯤 못가서 강을 건넜는데 그 강의 명칭이 요수인 것으로 되어있다. 이기록은 “管子(관자)” “小問(소문)”편에 있는 것을 옮겨 적은 것인데 “관자”의 기록에는 강을 건넌 것으로만 되어 있고 강명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런데 “설원”에는 요수라는 강명이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설원의 저자인 류향이 강명을 확인하여 보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죽국의 위치는 대체로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 노령현 지역이었을 것이라는데 이론이 없으며 노령현은 난하의 하류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西周(서주)시대로부터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齊國(제국)은 지금의 산동성에 있었고 당시에 제국의 환공과 관중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북부에 있었던 山戎(산융)을 토벌한후 동쪽을 향하여 고죽국 침공에 나섰으므로 그 지리적 관계로 보아 침공시 건넌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수잇다. “관자”는 전국시대의 저술이지만 제국의 환공은 춘추시대 초기인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이며 “설원”은 서한의 류향에 의하여 저술되었으므로 춘추시대 또는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지금의 난하가 요수로 불리어 졌음을 알수있다.
3.
지금의 난하가 요수였음은 “水經注(수경주)”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의 난하는 濡水(유수)라고도 불리어졌는데,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앞에 소개된 “관자” “소문”편의 환공이 고죽국을 정벌한 내용이 실려있다. 그리고 비여현 근처의 산 위에 있는 사당에 얽힌 전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전설에 등장한 그 지역의 강명이 요수로 불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여현은 고죽국 지역으로써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다. 이로써 “수경주”의 편찬자인 곽도원도 지금의 난하를 요수로 인정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