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1. 오늘날 고조선(古朝鮮)은 보편적으로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에서도 고조선이라 불렸다. 《삼국사기》의 위만조선조와 고조선조가 나뉜 것으로 보아 일연은 위만조선과 단군조선을 구분키 위해 고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2. 일반적으로 고려(高麗)라고 하면 후삼국시대 이후에 고구려를 계승한 통일 왕국 고려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고려”라는 호칭은 장수왕대 이후 후대 고구려에서 국호로 사용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중원고구려비 등에 고려라는 국명을 기록하였다.
중국 당나라 때 서견(徐堅)이라는 학자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지은 백과사전 《초학기》(初學記)에 밝힌 미역에 대한 내용에서도 고구려라는 명칭 대신 고려라고 쓰고 있다.
3.고구려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한 왕은 흔히 광개토왕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최대 영토를 이룩한 왕은 문자명왕이다.
문자명왕은 광개토왕의 증손자로,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이루어놓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잘 구가하고 유지해 나갔다. 광개토왕은 “땅을 넓힌 왕”이란 뜻이고, “넓은 땅을 통치한 왕”이라는 뜻은 아니다.
4. 고구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 때 강물을 이용해 적을 몰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물을 이용했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전투 과정에 대한 설명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물이 얕은 줄 알고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많았다.”라는 요지의 내용이 칠불사(七佛寺) 창건 설화로서 실려 있을 뿐이다.
5. 백제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실제로 궁녀가 삼천 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의자왕 치세를 기록한 19세기 이전의 모든 역사서에 몇 명인지 밝히지 않았다. 백제 의자왕의 나이(595에서 599년 사이 출생)와 관련하여 사극 등에서 의자왕이 너무 젊게 나와 시청자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의자왕은 7세기에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흥수·성충·계백 등보다는 더 일찍 태어났다. 또한 《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에서는 의자왕을 노왕(늙은 왕)이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