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朝鮮侯)로 불리던 고조선(예맥조선)의 최고 통치자가 왕을 칭한 것은 말기인 부왕(否王)과 준왕(準王) 부자 대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군장사회(Chiefdom) 단계를 지나 초기 국가(State) 단계에 진입한 기원전 200년 당시의 인구 규모는 어떠했을까. 국내 학계 일각에서 민족주의 사학의 영향으로 고조선의 강역을 크게 보는 상황에서 국가발전 단계에 입각해 고조선의 실체를 냉정하게 분석한 연구서가 출간됐다.
고대사 연구자인 김정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최근 출간한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최근 국내에 소개된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호구 관련 자료를 토대로 추정한 결과, 고조선 말기 왕이 다스린 영역과 인구는 조선현(朝鮮縣) 지역으로 한정할 경우 최소 1만7387명이며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한껏 확대해 낙랑군 11개현 범위, 나아가 위만조선 말기 범위까지 고려해도 최대 5만6297명을 넘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삼한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에 나오는 ‘(기원전 4세기)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역을 침략하고 2000여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사를 근거로 고조선이 강대한 고대 국가였을 것으로 보아 온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 원장은 “우리는 종종 고조선을 하나만 존재한 거대한 국가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너무 다르다”며 “조선과 예맥(濊貊), 진번(眞番), 임둔(臨屯) 같은 커다란 군장사회 가운데 조선, 즉 고조선이 가장 강해 왕을 칭하는 초기 국가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사기(史記)’ 흉노전에 유사한 내용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의 활약상이 기술돼 있는 점이나 ‘위략’의 사료 가치와 위상에 대한 중국 사학계의 비판 등을 예로 들며 ‘위략’의 기사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이 이번에 출간한 책은 지난 1973년 출간한 ‘한국 민족문화의 기원’을 시작으로 계속된 고조선 연구를 결산하는 의미를 갖는다. 한국 청동기문화의 기원과 고조선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김 원장은 지난 40년 동안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수집과 분석은 물론, 러시아·중국·몽골·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일대 현장을 답사했다.
김 원장이 그동안 분석대상으로 삼아온 고조선은 신화적 색채가 짙은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제외한 예맥조선이다. 예맥조선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사서를 통해 우리에게 기자조선으로 알려진 나라다. 하지만 기자조선은 기자(箕子)가 조선에 오지 않았고 중국 상(商)나라 유물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조선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돼 왔다. 이에 따라 김 원장은 기자조선이라는 이름 대신 ‘예맥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김 원장이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예맥조선(고조선) 말기의 인구를 추정하는 기초로 삼은 자료는 북한 평양 정백동 364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낙랑군 초원(初元)4년(기원전 45년) 현별호구다소□□’(□는 미판독) 목간이다. 조선현의 호구(호 9678, 인구 5만6980명)를 비롯, 당시 낙랑군 25개현 각각의 호구수가 기재돼 있는 자료에 연간 인구증가율을 바탕으로 산출한 상수를 대입해 위만조선이 멸망하던 기원전 108년 및 기원전 200년 고조선 말기의 인구를 산출했다.
김 원장은 책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청동기이자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파격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요령식동검’으로도 불려온 비파형동검은 지금까지 기원과 관련, 중국 ‘랴오둥(遼東) 지역이냐’ 아니면 ‘랴오시(遼西) 지역이냐’를 놓고 국내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했었다. 하지만 김 원장은 이 같은 견해를 배격하고 카자흐스탄 중북부 카라간다 지역의 청동기문화인 페드롭문화(기원전 15∼14세기)의 석관묘 유적에서 확인되는 ‘파인형동검(波刃形銅劍)’을 비파형동검의 기원으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카라간다 지역의 파인형동검이 유목문화의 동진에 따라 내몽골 지역의 파인형동검으로 이어지고 다시 랴오닝(遼寧) 지역과 한반도에까지 유입돼 비파형동검 문화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비파형동검 문화가 유목민족 계통의 파인형동검 문화와 랴오닝 및 한반도 지역의 토착적인 농경문화가 결합한 반농반목적인 사회의 문화였다”며 고조선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도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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