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남쪽은 高句驪와, 동쪽은 挹婁와,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가 되며,戶數는 8만이다.
(송화강 유역.)
高句麗는 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朝鮮,濊貊과, 동쪽은 沃沮와, 북쪽은 夫餘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丸都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戶數는 3만이다.
(내륙 압록강-두만강 근처)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戶數는 5천戶인데, 大君王은 없으며 邑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개마고원에 위치)
濊는 남쪽으로는 辰韓과, 북쪽으로는 高句麗·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戶數는 2만이다.
(동해안 북부 위치)
遼東郡,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
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요동군/5만 5972호,27만 2539명/요동반도 위치)
樂浪郡,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낙랑군/6만 2812호,40만 6748명/현 평안도,황해도 부근 위치.)
玄菟郡,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현도군/4만 5006호/22만 1845명/요동 동부.)
(한사군,요동의 인구는 한서지리지 출처)
(마한)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 10餘萬戶이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부근 위치.)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大國은 4~5천家이고, 小國은 6~7백家로, 총 4~5萬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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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은 경상남도,진한은 경상북도 부근 위치.)
후일 삼국의 영토가 되는 지역은 이정도고 이 인구는 한나라 시기의 인구이다.
고구려는 부여,옥저,낙랑,현도,요동,부여,동예의 일부의 영토를 차지하고
백제는 마한의 대다수(삼국통일전쟁 시점 기준ㆍ의자왕의 대 신라 공세~멸망 직전 부근쯤에 진한과 변한 일부 차지),신라는 동예 일부,진한,변한 부근을 차지한다.
당시 인구를 후일 삼국의 강역에 대충 맞추어보면 고구려 280,000~290,000호,백제 10만호 미만,신라 5만호 이상의 수준이었음을 볼수 있다.
물론 시대가 발전하면서 개발도의 차이도 조금씩 낮아지지만 (삼국시대 당시 개발도는 북쪽>남쪽이고 서쪽>동쪽이었다. )
대충 인구를 맞추어보면(호당 4.5명 기준) 후일 고구려 영역 140만,백제 ,신라 합이 75만명 이상이다.
멸망 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고구려가 멸망할때의 인구 69만호와 연남생이 투항한 10만호등의 합일것이고 가장 인구가 많을때는 이것보다 더 많았을것이다.
백제는 당서 76만호와 당평백제비 24만호 둘이 제일 신뢰할만한데 원삼국 당시 인구랑 비례해보면 당평백제비가 더 신뢰할만 하다.
신라는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강 영유 이후로는 백제보다 많았을걸로 추정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중국의 중원,한반도,일본의 인구밀도는 비슷할걸로 추정되고 중원의 면적 300만km2에 이후 당이 안정세를 찿으며 확보한 인구 5000만을 역산하면 인구밀도 km2당 17명 전후가 나오고 전성기 인구 8000만과 대비하면 27명 전후가 나온다.
그걸 기반으로 보면 통일 직후 신라의 면적 약 18만km2의 인구는 약 300만 전성기에는 약 500만 전후의 인구가 나왔음을 추정할수 있다.
대충 고구려 인구 69 10(연남생의 투항) a(전쟁중 유실)만호 즉 79 a만호의 인구는 대충 400만 전후로 추측할수 있다고 본다.원삼국 당시 고구려 강역의 140만에서 3배 전후로 늘어났다고 볼수 있다.
백제,신라 역시 원삼국시대와 비교해서 3~4배의 인구가 증가했다고 볼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당시 평안도 부근(낙랑)의 인구는 대충 120만 전후라고 볼수 있게된다.
그 영역의 소유는 사서에 따라 다르지만 대충 반씩 나누어 가졌다고 가정하면 통일 신라의 인구는 560만이라고 볼수 있게된다.
디시위키가 의외로 꽤나 정확했을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