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5-08-24 02:35
[기타] 고대 평양의 위치에 대한 인식 1
 글쓴이 : 가생이중독
조회 : 3,631  

2015년 동북아역사왜곡특위
고대 평양의 위치에 대한 인식

※ 영상 보다는 회의록을 간추려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회의록 중 연구사업 문제점, 보완점, 의원들의 당부 등은 제외하고 평양에 관한 것만 추렸습니다.

※ 발표자료에 제목은 회의록에 없는 것으로 편의상 제가 구별 작성했습니다.

※ 회의록에 보면 발표자료에 지도번호와 페이지가 있으나 생략했습니다.

※ 중복질문과 동일 답변은 생략 했습니다.

※국회에서 현재 3년 계획으로 평양 연구를 관련기관에 용역을 준 상태로 특위기준일로 현재 9개월이 지났습니다.

참고인: 평양연구팀장 인하대 복기대 교수, 평양연구팀원 허인욱 교수

1. 고대 평양의 치에 대한 인식에 관한 논의

발표자: 허인욱 교수

1. 고려에서 인식한 평양:
궁예가 세웠던 후고구려, 후에 마진으로 바꾸는, 태봉 이 나라에서부터 시작 
1.1. 궁예 인식
[신라가 당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던 까닭에 평양이 고구려 옛 도읍이며 그곳이 피폐해져서 풀만 무성하게 되었다.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 궁예가 자기 자신이 후고구려라고 하는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습.

1.2. 태조 왕건 인식
[옛 도읍인 평양이 황폐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번인(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침략하니 백성을 평양에 옮겨 튼튼하게 하도록 하라.]
-  궁예의 어떤 평양 정책을 이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풀만 무성하다’ 해서 궁예가 어떤 특정한 평양에 대한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함. 이에 대한 설 중 하나는 궁예가 나중에 태봉이나 마진으로 고구려라고 하는 명칭을 빼버리고 해서 어떤 고구려 의식이 퇴색된 것으로 보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또 기록의 부재로 인해서 그런 것들이 안 남아 있었을 것이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1.3. 고려의 평양에 대한 정책
 고구려 평양에 대한 정책은 왕건 즉위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이와 관련해 이제현은 ‘왕건이 여러 차례 서도, 평양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 변경을 순찰하였으니 그 뜻은 역시 동명왕의 옛 땅을 우리나라의 전해오는 귀한 물건처럼 여겨 반드시 석권하여 소유하려 한 것이었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도는 아시겠지만 평양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몽이 동명왕의 어떤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3.1. 동명왕과 관련
평양과 관련해서는 고구려에서는 이제 동명왕과 관련한 어떤 행사들을 많이 하는데 그게 동명성제사나 혹은 동명신사에 제를 올렸다. 이런 것들로 이야기들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1.3.1.1. 예종
예종이 서경에 행차하여서 지은 시에 ‘동명궐의 길이 험하여’라고 해서 평양을 동명궐, 동명의 어떤 수도, 고구려의 수도라고 표현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당시 예종대에는 아시겠지만 여진과의 동북9성 전쟁이 있었고, 그런 시기였고 그 당시에 여진정벌을 하면서 고구려 계승의식을 굉장히 부각시키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지어진, 예종 11년에 지은 김부일이 찬한 서경용언궁대연치어(西京龍堰宮大宴致語)를 보면 ‘곧 기자(箕子)의 풍습을 일으킴이 바로 오늘에 적당하였고, 요양의 땅이 다시 우리 강토로 들어옴을 보게 될 것이니, 실로 비교할 만한 것을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해서 당시 거란이 멸망하고 금이 성장을 하는 이 시기에 요양 지역까지―지금의 요동 지역이겠지요―요동 지역까지 고려의 영토로서 석권해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때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예종이 평양을 동명궐이라고 했다라고 하는 것은 조금 우리가 무시하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3.1.2. 명종
[예조묘에 제사 지냈다.]라고 했는데 예조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를 세운 임금을 말합니다. 그런데 앞서서 계속해서 평양은 고구려와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지역을 고구려의 어떤 발상지, 수도로서 인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동명왕의 치제나 어떤 동명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강조한 것은 평양이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발흥한 곳이라는 그런 의미도 있고 구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다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고려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평양이 고구려의 옛 도읍이라는 점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3.2. 고려인이 인식하는 고구려 평양 지역
거란과의 전쟁 때 서희가 소항덕,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언급한 내용
[우리나라는, 고려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했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이 회담을 통해서 고려는 천황학주지성(天皇鶴柱之城), 요동지역, 요양지역이라고 하는 곳과 그다음에 일자별교지수(日子鼈橋之水), 압록강 한 지류인, 개인적으로는 혼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두 지역 사이를 완충지대로 삼아서 영토 획정을 합니다.
  이 당시의 수도를 평양이라고 한 것은 개경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임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발언이 아니었겠느냐라고 할 수가 있지만 당시 거란은, 5경 제도를 북방민족들은 했기 때문에 고려가 개경 외에 서경이라고 하는 것을 두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반박을 하지 못하고 영토 획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꼭 평양을, 앞의 서희의 논리는 고려의 서경을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인식했었던 것도, 분명히 그렇게 한 것도 같지만 조금 다르게 볼 글도 있습니다.

김부의가 금과의 외교에서 보주라고 하는 지역을 회복하지 않겠다. 라고 하니까 감사의 표를 올린 거였는데 거기의 표현 중에 ‘구려의 땅은―이때 구려는 고구려를 말합니다―저 요산을 주로 하고 평양의 옛 땅으로 압록강을 한계를 삼았는데 역대로 여러 차례 변천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해석본들에서는 앞의 구려본지 주피요산(勾麗本地 主彼遼山)’과 평양구허 한어압록(平壤舊墟 限於鴨綠)을 별도로 나누어서 해석을 했습니다. 즉 ‘구려본지는 요산을 주로 한다.’ 하고 끊고 평양은 구허, ‘평양의 옛터는 압록강을 한계로 한다.’ 해서 별개의 어떤 문장으로 나누었는데 이 같은 경우는 구려본지가 한어압록이라고 해야 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구려, 고구려의 본 땅은 요산인데 그 요산은 평양의 옛터이고 그다음에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는다. 라고 번역하는 게 문맥상으로는 좀 순리에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요산은 아시겠지만 요하를 말하는 겁니다. 즉 이때 요산이라고 하는 것은 요양지역을 말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평양구허’라고 하는 것을 한반도 내로 한정할 수 있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이제 이런 평양에 대한 혼란이 있었던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그러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1.3.2.1. 김부식 삼국사기에서의 고구려 평양 인식
고국원왕 13년에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라고 되어 있고 이에 관한 글이 삼국사기지리지에 보면, 9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보면, ‘옛 사람의 기록에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연대가 정녕 자세한 것이 이와 같다.’ 하면서 그 뒤를 넘어가면 앞서서 말씀 했던 고국원왕 13년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겼다고 하면서 ‘그곳이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면산’이라는 글과 함께 실은 여기에서도 ‘실제로 그러하였는지의 여부를 알 수가 없다.’ 즉 평양의 동황성이 지금의 서경인지는 잘 모르겠다. 라는 표현이 같이 있습니다.
즉 평양에 대해서는 이 시기, 김부식이 편찬했던 삼국사기가 지어졌던 시기에는 약간 혼란이 있었지 않느냐, 아직 평양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를 못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1.3.2.2. 의종대 고구려 평양 인식
의종대 기록을 보면 ‘평양이란 신경을 돌아보면’ 이것 같은 경우는 윤인첨이 이 당시 의종이 평양, 서경에 행차를 해서 잔치를 열면서 지었던 글인데, 즉 그 서도를 평양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심경으로 표현도 하고 있으면서 주몽의 옛 도읍과 같은 곳이라고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서경, 즉 지금의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부분은 뒤로 갈수록 좀 더 명확 해집니다.

1.3.2.3. 삼도부와 제왕운기에 실린 고구려 평양의 인식
[서도가 처음 이룩될 때 동명이라는 이가 이곳에 도읍을 했다.](최자의 삼도부)
[마한의 왕검성에 주몽이 나라를 건설했네.](제왕운기)
모두 이것은 지금의 평양을 가리킵니다. 제왕운기 같은 경우는 개사수를 지금의 대령강, 왕검성을 지금의 서경이라고 해서 분명히 서경, 지금의 평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고려 말로 가면 좀 더 명확해집니다. 

1.3.2.4. 권근의 고구려 평양의 인식
권근의 글들을 보면 기자가 평양에 도읍을 했고 그다음에 고 씨 혹은 주몽 씨 이후로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에 익숙해져서라고 해서 고려 말로 가면 평양이 주몽이 도읍한 곳이다. 라고 하는 인식이 확정된 것 같습니다. 

1.4. 고려인들의 고구려 평야에 대한 인식 결론
이상으로 고려인의 평양 인식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고려인들은 대체적으로는 고려의 서경이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고려 전기에는 고구려의 평양이 고려의 서경인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점은 김부의의 표나 삼국사기의 평양 동황성 언급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혼란도 고려 후기에 가면 희미해져서 서경이 고구려의 평양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몽골 간섭기를 겪으면서 여러 차례의 전쟁이나 외교 분쟁 등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외부로 어떤 고구려의 영토를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던 탓에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앞서서 말씀드렸지만 고려 전기에 대한 인식과 고려 후기에 가면서 인식은 조금 달라 고려 전기에는 조금 불확실한 듯한 표현을 했다면 후기에 가면 확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점에서 어떤 차이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고려인들의 인식이고 고려가 존재했을 때 그 주위에 위치했던 거란이나 여진․몽골 등, 왜냐면 이 부분도 중요하게 생각해 볼 부분이 고려만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인식을 가졌던 게 아니고 거란 같은 경우도 고구려를 계승했다라고 하는 것을 서희와의 담판에서도 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고구려를 이었는데 너희들이 왜 그 영토를 침범하느냐 하는 이런 말들에서 좀 그러한 언급을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북방민족들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면 좀 더 평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2. 북방민족들이 본 고구려 평양 인식
2.1. 요사를 통해 본 고구려 평양
동경요양부에 대한 서술입니다.
전체적인 어떤 서술인데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내니 요 동경이 바로 이곳이다.] 해서 평양성하고 곧 거란의 동경이 같은 곳임을 말하고 있고,

또 좀 뒷부분에는 ‘홀한주-발해의 영역입니다-는 곧 옛 평양성이니 중경현덕부라 불렸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암연현이라는 거란의 한 현을 말하면서 ‘옛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해서 

이 요사 같은 경우는 요양, 그다음에 요 동경, 중경현덕부 그다음에 암연현의 서남쪽, 이 세 군데가 고구려의 평양인 듯이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요양이나, 요양은 아실 것 같고 중경현덕부는 현재 학계에서는 지금의 화룡지역, 17페이지의 그림1을 보면 화룡지역이라고 해서 두만강 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고 있고 지금 요 동경이라고 하는 지역은 요양이고 그다음에 암연현 같은 경우는 밑에 해성이라고 돼 있는, 그림에 표기되어 있는 그 부근입니다. 즉 요사 같은 경우는 적어도 고구려 평양성이 세 군데 정도 있었던 걸로 인식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2.2. 금나라 사람의 고구려 평양 인식
금나라 사람의 인식을 보겠습니다. 이거는 금나라 사람 왕적의 글인데 보면 명창 개원 2월 12일 날 심주, 심양에 유숙을 했다. 숙박을 했다라고 하면서 이곳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당 고종 때 이 적한테 동정을 명했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설치하고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했습니다. 그리고 뒤 글을 보면 ‘실은 지금의 심주이다.’라고 해서 심양이 곧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던 곳이다. 라고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2.3. 원사를 통해 본 고구려 평양 인식
원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녕로를 설명하면서 [고구려 평양성이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 동녕로는 조금 지금의 현재 북한의 평양지역이나 그 이북지역에 두어졌다가 나중에 요양으로 이동이 됩니다. 그래서 이 글에 보이는 평양은 요양지역을 말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설명이 뭐냐면 ‘옛 평양이 아니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옛 평양과 새로운 평양이 있었다.…… 
설명을 좀 다시 한번 해야겠네요.
보시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을 공격하자 그 나라 동쪽으로 옮겨 갔는데 압록강 동쪽에 있다 그러면서 이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즉 옛 평양이 있고 새로운 평양이 있었다라고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4. 북방민족이 본 고구려 평양 결론
송․요․금․원이 인식하는 고구려의 평양성에 대한 내용을 살펴봤는데 특히 북방민족의 인식에서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요동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주목이 됩니다. 물론 요사에는 중경현덕부 같은 경우는 요양지역보다는 길림지역이기 때문에 조금 달리 되어 있기도 하지만 한반도 내로 한정하지 않은 것은 같은 것 같습니다. 
특히 요사에는 요양이나 화룡, 해성 부근에 세 군데 평양성의 존재가 찾아지며 금나라 사람 왕적은 심양을 고구려의 안동도호부가 있던 평양성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사에는 장수왕대의 옛 평양인 요양과 멸망기에 새로 옮겨 간 평양이 별도로 존재한 듯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약간 정리만 하자면 고려의 인식과 북방민족의 인식은 서로 약간의 차이가 나고 있고 특히 북방민족의 인식 속에서는 어떤 고구려의 평양을 한반도가 아닌 곳에 두고 있어서 앞으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가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의원 질의: 고려 초기에는 좀 혼란이 있었다 이런 말씀……

평양연구팀원 허교수: 
예, 고려 전기에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예종대 같은 경우는 고구려의 요양지역까지, 이제 그 당시에 금이 흥기를 하면서 거란이 밀리고 하는 과정에서 고려는 계속 영토 확장을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는 과정에서 요양지역까지 고려의 영토로 생각을 했던 시기였는데 그 당시 한 10년 정도 뒤쪽에 보면 그 요양지역이 고구려의 본지였고 그곳이 평양이었다라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제 그런 인식은 좀 드물고 대부분의 인식 가운데는 서경이 평양이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전기와는 달리 후기에는 좀 확고하게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이었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원 질의: 후기로 가면 세월이 흐르면서, 또 고려가 사실은 처음에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그 의지가 희박지면서 이제 그런 인식이 생겼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중국 측 기록에 보면 요녕성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오히려 그때 사료가 더 정확하다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건가요?

허교수:
고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그게 아무래도 그 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은 변동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초반에 확장할 때와 후기에 몽골 간섭기를 지나거나 이러면서 아무래도 더 이상의, 그 어떤 영토선을 여기까지라도 보존해야 되는 입장하고 아마 그러면서 굳이 고구려 평양 의식을 드러내기는 해야 되는데,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드러내야 되는데 아무래도 평양지역에 좀 집중해 가지고 더 이상의 확장보다는 그곳이, 그러면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거를 강조했을 것 같고. 
말씀하신 그런 북방민족의 인식이라고 하는 게 실은 조금은 단편적으로 나타나기는 합니다. 이제 글 하나하나가 나타나기는 하는데 좀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본다면 좀 더 고구려와 평양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됩니다.

의원 질의: 여기서 언급됐지만 장수왕이 평양 천도한 거는 언급이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심플하게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 전에는 요녕성 쪽에 평양이 있었고 이후에 천도를 해서 그 평양이, 지금 말하는 평양이 있는 거 아닌가……

허교수:
예, 북방민족들의 기록들로 보면 분명 그 부분은 뭐, 특히 장수왕 때 평양, 427년에 천도한 평양은 북방민족들의 인식에서는 요양지역이 맞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멸망기가 되면서 이게 옮긴, 이제 당이나 수하고 싸움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이 요동지역을 공격하니까 지금의 평양으로 옮겼다라고 그 북방민족들은 인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의원질의: 그 삼국유사에도 우리 평양에 관한 기록이 있지 않아요, 평양성에 관한?

허교수:
삼국사기에는 평양이라는 용어가, 성이 나오는데 삼국유사에는……, 직접적으로 거론은 안 되고 있고요 간접적으로 거론은 되고 있습니다.

복교수: 
삼국유사에 그런 기록이 나옵니다. 나오는데, ‘고구려의 도읍지가 요수의 북쪽에 있다.’라는 표현으로 나오는데요. 그 요수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요수는 곧 압록수이고 압록수는 곧 안민강이라고 부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당시 고려 초기나 중기쯤에 요수라고 인식하는 거는 현재 중국 요하나 혼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의원질의: 그러면 그런 기록은 학계에서 비중 있게 받아들여지진 않나요?

복교수:
현재까지는 그 기록에 대해서 학계에서 크게 주목하진 않습니다. 

의원질의: 왜 그렇죠?

복교수:
그건 연구자들, 그 연구자 선생님들께서 다양한 견해가 있어서 제가 말씀드리긴 어려운 부분이고요. 그런데 그 기록은 굉장히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봅니다. 

의원질의: 그 앞부분 제가 질의했지만 중국 측 여러 나라 기록에는 평양성이 요녕성 등등으로 기록돼 있는 반면 우리 고려 후반기는 우리가 말하는 지금 평양으로 이렇게 돼 있는 이런 차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복교수: 
그거는 중국이 역사를 인식하는 태도에 관련 있다고 봅니다. 고구려 평양성 그러니까 고구려와 중국의 역사는 굉장히 지금도 모범적인, 중국 역사에서 대외를 공격을 할 때는 어떠한 형태를 취했느냐는 모범적인 사례인데요. 중국 황제가 친정을, 그 군대를 직접 이끌고 외국을 공격하는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수나라․당나라, 두 나라 두 번 연속에 걸쳐서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 침략에 나섭니다. 그런데 두 번 다 실패를 합니다. 실패를 하기 때문에 그 기록에 대해서는 중국 역사에선 굉장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남겨 놓습니다. 그래서 그 당서나 신당서, 그렇게 하고 자치통감에서 기록되는 고구려의 그 도읍지 위치 같은 경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교훈이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겨 놓은 것 같고요. 한국 측 같은 경우에서는 방어하는 입장이었고 그리고 나중에 이제 한국 역사가 영토적으로 축소되는 과정에서 그런 기록들이 그렇게 흐릿하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평양성 위치를 고증하는 데 어떠한 자료를 쓰느냐면 당서를 쓰고 있습니다. 당서에는 구당서․신당서 2개를 쓰는 거 같은데요. 그렇게 된다고 보면 김부식이 평양성 위치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도 중국의 당서나 신당서를 인용을 했다 한다면 아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했을 때는, 감수를 했을 때에는 아마도 그때 평양의 위치는 중국 요양이나 어디로 본 것 같습니다.

의원질의: 그러면 지금 우리 연구하시는 학자들은 현재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느 소위, 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 

복교수:
평양 위치에 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즉 정약용이나 이런 분들 이후로 거기에 대해서 크게 고민을 안 하고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평양 위치에 관해서 만주지역을 다녀온 사람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다녀온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박지원이나 이런 분들인데 그런 분들 같은 경우는 평양의 위치에 대해서 분명하게 만주지역 요양이나 그쪽에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보지 않은 분들, 특히 다산 정약용 같은 경우는 평양지역을 갖다가 지금 한반도지역으로 완전하게 고정을 시키면서 그 인식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한 100년 정도 흐르다가 보면 일본학자들에 의해서 거의 뭐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완전하게 픽스가 됩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는 평양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는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원질의: 그럼 우리 연구팀은 앞으로…… 지금 어느 지점까지 와 있습니까, 연구가? 그래서 어떤 결론을 잠정적으로라도 갖고 계신가요?

복교수:
방금 말씀드린 대로, 허인욱 교수께서 말씀드린 대로 올해 연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체 역사와 현재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평양 인식이 어떻게 되고 있었나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올 한 8개월 동안 연구를 진행해 본 결과 사료상으로 보면 평양의 위치는 적어도 장수왕 이후로는 아마 만주 쪽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지금 판단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잠정적인 판단이어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2차년도부터는 그 두 가지 설에 대해서 열어 놓고 고고학적으로 그렇게 하고 천문학이라든지 주변 학문이 총 동원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 보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의원질의: 평양 위치와 관련돼서 아주 중요한 연구를 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평양 위치와 관련해서 북한 학계는 대성산성이나 안압궁성이 평양성이다 이렇게 대체로 그런 의견들인 것 같고, 일본 학계도 대성산성이나 청암리토성 이렇게 비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 학계나 일본 학계의 이 문제에 대한 연구 동향을 좀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이게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저도 사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에 가둬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요양설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미 있고 우리가 관심을 많이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중국 명․청 사료에도 이런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또 특히 아까 수나라․당나라 말씀하셨는데 수양제 고구려 침공에서 보여 주듯이 우리가 평양을, 북한 평양을 고착시키지 않고 조금 더 시야를 넓게 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환인의 오녀산성도 가 봤고 집안의 국내성 그리고 평양도 가 봤습니다만 사실 이쪽 지역들은 고고학적 증거들이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까? 뭐 고분군도 발견이 되고 그런데, 우리가 시야를 넓히는 건 좋은데 요양설이라고 할 때 실제로 그쪽에서 어떤 고고학적 근거․증거들이 좀 발견되는 그런 성과들하고 연결되지 않으면 그게 좀 인정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고고학적 근거나 이런 데 대해서도…… 
예를 들면 그렇지요. 심양 박물관에 가면 우리 강화도에 있는 지석묘하고 정말 똑같은, 그래서 우리가 고조선의 지석묘하고 비파형동검, 그래서 고조선의 강역을 우리가 만주까지 이렇게 보는 것도 고고학적 증거들하고 연결돼 있다고 보는데, 실제로 뭐 요양이라는 데가 요하를 끼고 있고 뭐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 측면 있다고 보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고고학적 증거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복교수:
위원님께서 말씀해 주신 게 세 가지 사항인데요. 첫째는 북한학계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 그리고 만주지역의 고고학적인 자료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먼저 북한학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학계에서는 평양이라는 문제는 유사 이래 북한 평양을 떠난 적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대성산성, 안학궁 이런 부분 얘기를 하는데요, 북한학계가 중국 만주지역 고고학계의 단절된 그런 것도 있을 거고, 아니면 자기들 고집을 부리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실제 만주지역 가면 안학궁이나 대성산성 그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유적들, 성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 꼭 그것을 고집해 가지고 주장한다고 그러면 굉장히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학계는 청암리토성을 주로 얘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일본학계는 1910년도 이후로 평양에 관한 생각은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평양 문제를 갖다 일본학자들이 연구할 때 1910~1920년대, 저희들이 똑같이 활용하고 있는 요사, 금사를 다 읽어 보고 있습니다. 당서, 구당서 다 읽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인용하는 자료를 보면 고구려 평양성 위치가 어디라고 딱 집어서 하는 자료는 다 에둘러 피하고 가고 있습니다. 그 앞 구절까지 인용을 하다가 그 뒷 구절부터는 인용을 않는 그런 자세를 유지하고 있고요. 

그다음에 세 번째로 집안이나 이쪽에 대한 고고학 자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마 언제인가는 지금까지 연구한 것들이 공개가 될 것 같은데 집안의 고고학 자료들의 연대가 AD 2세기, 한 150년 정도가 가장 이른 시기 유적으로 나왔고, 그렇게 하고 집안의 국내성터를 발굴했는데 최하층부 유물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AD 330년경으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집안의 국내성 얘기가 다시 한번 검토되어야 되는 그런 상황이고요. 
환인 같은 경우도 오녀산성 그쪽의 발굴유물을 보면 가장 유물이 훌륭하고 규격화된 유물은 AD 4세기 전후 무렵이 가장 좋은 유물들과 그리고 좋은 건축물들이, 훌륭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요양지역의 유물들을 보면, 실제 중국 만주지역에서 유적․유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요양입니다. 요양인데, 요양의 AD 4세기 이전의 유물․유적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무조건하고 동한시대의 유적․유물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고고학에서는 어떻게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데요. 
실제 요양지역에 있는 적지 않은 벽화고분과 집안지역에 있는 벽화고분이 유사한 점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요양지역 같은 경우는 돌로 무덤을 쓰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대개 중국 사람들 같은 경우 돌로 무덤 잘 안 쌓습니다, 벽돌로 쌓지요. 그래서 요양지역에 있는 고고학적 유물들 이런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시각차가 있는 것이지, 그 유물․유적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분포도나 수량적으로 많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고 그러면, 최근 요양지역에서 수벽도라고 그러나요? 택견 같은 무술 하는 벽화고분이 하나 발견됐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에 대해서 굉장히 논란을 하다가 동한시대 때, 중국 동한의 벽화고분이라는 식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요양지역의 고고학적인 자료는 다시 한번 봐야 될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의원질의: 조금만 더 보충해서, 예를 들어서 수도라고 하면 도성이 있을 것이고요, 또 왕궁터라든지 어떤 문화적 축적의 결과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지금 말씀하신 것하고 관련되는데 어쨌든 왕들의 무덤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발견이 되어야 되는데, ‘양식적인 연관도 있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복교수:
예, 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910년대 요양지역의 사진을 보면 요양지역에 굉장히 큰 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무덤도 기원전 5세기부터 시작을 해서 요양지역에는 대형 무덤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대형 무덤들이 많이 있는데 그 무덤들을 거기가 어느 나라의 왕도였다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귀족의 무덤 등등 이런 것으로 표현이 됐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것은 제가 아전인수격인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주로 쓰던 붉은색 돌을 사용해서 성을 축조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데 그것을 다 지나치기 때문에 확인을 못 하는 것인데, 그리고 조선시대 때나 그 이전 시대 때 기록을 보면 요양지역에 굉장히 큰 성이 있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화가 되면서 그 성들이 모두 없어진 그런 상태입니다. 

의원질의: 교수님 발표를 들어 보면 송․요․금․원 등 이렇게 중국의 당시 국가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평양은 한반도 내 평양은 아닌 것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부분들이 우리 학계에서 얼마큼 그 이전부터 천착되어 왔는지, 사실 우리 동북아역사왜곡특위 위원님들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많이 우려를 가지고 계신 거거든요. 
흐름상으로 보면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고려 초기에는 한반도 내에 위치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 이런 것까지 포함한 인식이 있다가 고려 후반으로 가면서 이 부분이 한반도 내로 고착화됐고 그게 조선시대까지 죽 이어졌는데 일제시대에 거의 확고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인식을 하면 되는 겁니까? 

허교수:
아까 말씀드렸지만 고려 초기 평양지역이라고 했던 지역 서경, 지금의 평양 같은 경우는 아마, 그 평양이라는 지역이 지금의 평양도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재 역사 인식들 속에서 제가 보니까 그 평양이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수도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그 지역에 대한, 평양을 평양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은 아니거든요. 다만 그 이전……

의원질의: 평양이 계속 천도했다는 그런…… 

허교수:
이동했을 수가 있는데 그런 인식들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고 고려 말기로 가면 아까도 자료에 보셨지만 ‘이곳이 주몽이 건국한 곳이다’라고 해 버리는 인식들로 굳어지는 것 같습니다. 

의원질의: 그러면 지금 저희가 역사를 다시 되짚어보고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의식 속에는 그런 인식이 고착화되기 이전까지 파헤쳐서 실제로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인데요. 지금 연구의 정도라든지 이런 부분들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다고 교수님 스스로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고, 아까 복 교수님 말씀까지 같이 종합해 보면 특히 북한의 경우에는 한반도 내에 두는 인식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도 지금은 논의를 확장하거나 자유롭게 하는 데는 좀 어려움이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시고 향후에 그러면 우리 연구가 더 활발해지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그런 부분까지 같이 두 분 다 말씀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허교수:
제가 고려시대를 주전공으로 하고 있으니까 그때부터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답변드릴 수가 있고, 그 이전의 인식, 평양 천도를 하거나 이런 부분들은 아마 복 교수님이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실 것 같습니다. 
현재 학계에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라고 하는 것은, 그 인식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전부터 지금의 평양이 평양이다라고 하는 데서 별다르게 생각을 안 하고 논문들을 쓰셨던 것은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고구려 계승의식에 대해서는 많이들 썼지만 평양 자체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이 글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찾아봤는데 고구려 계승의식에 대해서는 많이들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평양 위치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의원질의: 그 부분이 지금부터 더 좀 활발하게 논의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허교수:
예,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그런데 이게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특히 남아 있는 기록이라고 하는 게 고려 후기나 조선시대 기록들이 그렇게 남아 있다 보니까 더 이상의 현재 상태에서, 이전까지 연구는 아마 그런 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안 해 봤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뒷부분은 복기대 선생님께서 좀 더 얘기를 해 주시는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복교수:
(현재 연구단원이 각 분야 8명으로 구성, 군사/경제 분야가 빠져 있어 보충할 계획으로 생략)
지금 북한과 한번 공동연구를 해 보고 싶은데, 접촉은 해 보고 있습니다. 접촉은 해 보고 있는데, 언더로 접촉을 해 보는데 통일부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은 오는 것 같아요. 오는 것 같은데 통일부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북한에서 동의를 해 주느냐, 안 해 주느냐, 그 문제거든요. 그래서 북한 쪽은 저희들이 접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마 위원님들께서 그 문을 열어 주시면, 북한과 공동 연구를 하면 굉장히 연구의 질이 높아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다만 북한은 워낙 평양에 대한 인식이 강해서 평양 존립 문제, 평양성이 위치가 바뀐다고 그러면 다른 문제까지 연동이 될 수 있어서 아마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한국학계에도 지금 이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가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중진 학자 그리고 원로 학자님들을 찾아뵈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하시는 말씀이 평양은 만주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평양이 만주에 있을 경우에 그 후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는 얘기를 많이 하세요. 그러기에 제가 ‘그것은 저는 거기 사료 있는 대로만 밝혀 놓고 고고학 자료 이런 것을 보완해서 그것만 해 놓고 나면 그것 전공하시는 분들께서 다시 힘을 모아서 다른 연구나 후속을 진행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말씀이 ‘네 말은 맞는데 이것 감당해야 될 부분이 굉장히 많은 부분이니 조심해서 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하 연구과정의 어려운 점을 제도적으로 보완건의로 생략.)

의원질의: 허인욱 교수님, 오늘 고려시대, 고려와 이웃 국가들의 고구려 평양 인식을 기초로, 그걸 가지고 과거 고구려 수도 평양이 어디일까를 이렇게 추정해 본다는 것은 저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발해고를 쓴 유득공, 왜 발해부터를 우리 한국의 역사로 안 보느냐 이걸 문제 삼았거든요. 그건 제 짐작으로는 어쨌든 신라가 통일하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좀, 고구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과거에 동북아시아 많은 부분을 했던 영토가 줄어들면서 그 문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했지 않았는가 하는―짐작입니다마는―그렇기 때문에 그런 우리 자체적으로도 비판이 있는 것인데 고려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했느냐를 가지고 과거를 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고 보여져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부식 삼국사기, 이렇게 고려시대의 인식으로 보면 과거의 고구려 수도를 지금의 평양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삼국사기로 보면. 그런데 여기의 강원대 남의현 교수 발표 또 복기대 교수님도, 지금 잘 살펴봤는데 여러 가지 아닐 수 있다는 것, 명나라가 설치한 동녕위가 조선인으로 구성됐고 이 사람들이 랴오닝을 평양으로 봤다, 또 복기대 교수님도 여러 가지 이유에…… 
그리고 잠깐 봤더니 고구려에서 백제와 신라로 가는 길은 바다를 건넌다, 그런 것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봤을 때, 그것뿐만 아니라 제가 최근에 중국 역사서를 읽어 봤더니 중국의 가장 위대한 3대 황제 중에 당나라 태종이 들어가는데 당태종이 다른 거는 치세를 잘했는데 고구려를 침공한 것을 굉장한 후회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만일에 우리가 장수왕 이후에 평양 정도로 이렇게 위축돼 있는 여건을 가진 나라였다면 수양제뿐만 아니라…… 여기 수양제에 관해서는 청나라 후기 역사서인 ‘봉천통지’에서 수양제가 갔을 때 요수 바로 앞에서 했다는 그런 내용도 좀 들어 있다고 그러고, 당나라 태종이 그거를 후회할 정도의 그런 강력한 국가였다면 지금의 평양을 수도로 가지고 있는, 그렇게 수세적인 각도에서 수와 당을 대적할 수는 없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의견도 듣고, 그다음에 아까 복기대 교수님이 그러면 과거에 평양이 저렇게 있었다면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그러는데 그거 어려울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자꾸 혼동을 시키는데 중국 동북공정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고조선과 고구려 영토가 이렇게 강력했다는 걸 주장하는데 지금 그 역사를 찾자는 것하고 그 영토가 우리 것이니까 영유권을 주장하는 점하고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 말이지요. 이것은 로마가 영국까지 지배를 했던 걸 주장한다고 해서 지금 영국 영토를 우리 거라고 이탈리아가 주장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게 혼동이 있어요.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가서 만주…… 우리 거니까 우리 거다 하는 사람이나 우리 역사를 찾으면 역사적인 외교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둘 다 대단히 잘못된 거라는 말이에요. 역사는 역사대로 찾고 우리가 영유권에 관해서 백두산정계비로 최근 거를 할 수 있는 거는 하는 거지만 과거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우리가 강조하는 거는 아니거든요. 이 점에 관해서 두 분이 간략하나마 견해를 밝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교수:
먼저 인식 문제로 살펴보는 게 좀 어렵지 않겠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번 연도의 인식 문제라고 하는 건 어떻게 해서 평양이 지금의 평양으로 고착이 됐느냐라고 하는 부분, 그다음에 그거에 서로 간에, 국내에도 마찬가지고 외국 다른 자료 등에서 혹시나 다르게 볼 여지가 있느냐라고 하는 것들이 단순하게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연구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해서 그것들에 대한 ‘아, 이 부분이 잘못돼 있구나’ 하면 다음에 그런 인식들도 있고, 이게 잘못된 인식도 있다, 그래서 연구를 좀 더 깊게 할 수 있는 기본이 된다라고 생각을 해서, 여하튼 시기별로 알아보는 게 어떨까라는 점에서 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삼국사기 같은 경우에, 말씀을 하셨는데 삼국사기의 김부식 같은…… 김부식인지 모르지만 김부식이 주로 맡아서 했기 때문에 김부식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실은 평양 동황성을 지금의, 그러니까 평양 동황성으로 고국원왕 때 옮겼는데, 지금의 목멱산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서경의. 
그런데 그 당시 그 기록은, 그러면서 그 뒤에 지리지에는 뭐라고 되어 있냐 하면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자기들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들은 평양으로 인식을 한다’라고 해서 처음에는 그 부분이 아마 고려 전기나 초기에 쓰여졌던 기록인 것 같습니다, 평양 동황성으로 옮겼다라고 하는 게.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지금’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아마 고려시대 인식일 텐데, 삼국사기 쓸 때는 그것을 가져다가 인용을 하고, 그게 뭔가 자기들이 봐도 좀 이상하라다라고 하지만 자기들은 평양으로 하겠다 해서 아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평양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게 지금 이거 하는 과정에서 드러났고요. 
그다음에 아까 ‘전쟁 과정에서 지금의 평양에 있는 걸 굳이 침략을 하겠느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평양이 이동을 했고, 아까 원사 같은 경우는 전쟁이 나니까, 왜냐하면 특히 전쟁이 나면 요동 지역을 먼저 치지 않습니까. 그 같은 경우에 요동 지역에 만약 평양이 있었다면 임금이 있던 곳이 위험해지니까 그걸 이동을 해서 지금의 평양으로 옮겨 왔다라고 이해를 하시면 전쟁을 하거나 이런 데는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복교수:
좀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평양 연구를 한다고 그러면서 원로 선생님들을 찾아뵙고 말씀을 들었을 때 평양 하나 옮겨 놓고 나서 그 후속조치를 어떻게 할 거냐라는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도 임 위원님처럼 똑같은 생각입니다. 그거는 어떠한 것이 사실적으로 규명이 되면 거기에 따라서 모든 걸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에 당나라와 전쟁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거는 저희들이 부족해서 이번에 군사를 하는 분을 한 분 모시려고 그러는데요. 실질적으로 지금 평양의 고구려 성이, 고구려에 평양이 있었다고 그런다면 아마도 당나라에서는 공격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아무리 그걸 봐도, 그렇게 하고 당나라 군사가 거기까지 올 수 있는 어떤, 거리상으로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거 하나를 빼앗으려고 오는 거는 좀 문제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은 공동으로 중국 기록과 다시 한번 비교 검토를 해 가면서 연구를 해야 되겠는데, 참고로 말씀드리면 중국 기록의 적지 않은 기록에 고구려 중기 이후의 세력권이 지금의 중국 요서 지역, 그러니까 지금 조양 그 일대까지 훨씬 넓게 들어간 기록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까지 아마 차후에 연구가 돼야 될 거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의원질의: 조금 전에 존경하는 임내현 위원님 말씀 하신 그 부분, 발해와 관련해서는, 논문에 발해에서는 평양에 대해서 어떤 자료가 없나요, 발해 자료 중에서는? 

허교수:
예, 지금 현재 발해에 관한 자료라고 하는 게 국내에서 만들어진 건 유득공의 발해고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고 그 이전 거는 중국 기록에 남아 있는 걸 하다 보니까 중국인들의 인식과는 큰 차이가 없이, 그다음에 평양에 관한 얘기는 그렇게 제가 못 본 것 같습니다. 

의원질의: 고려에서 평양을 어떻게 봤느냐 하는 건 고려가 발해를 어떻게 봤느냐, 고려인들이, 그런 것과 다 연관시켜서 연구가 됐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저도 했거든요. 그건 추후에 더 연구를 포함시키든지 해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드리고요. 
평양이 여러 개다 하는 것은 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인식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허교수:
지금 복 교수님 같은 경우도 평양이, 여러 군데로 천도를 했었다, 천도를 하는 과정에서 평양이…… 그 당시에 명칭이라고 하는 건 천도를 하게 되면 그 명칭도 같이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현재 제가, 그러니까 오늘 드린 거에서는 거란이나 이런 나라들에서는 분명히 여러 군데라고 인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인식의 문제니까 사실과는 좀 별개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식이 이렇다라고 하는 건 우리가 좀 더 살펴볼 문제가 있을 것도 같고, 아마 천도나 거기에 대해서는 복 선생님이 좀 더 많이 아시니까 한번…… 

복교수:
제가 원로 선생님들하고 그 전공자들한테, 모든 분은 아니지만 굉장히 많이 찾아가서 의견을 여쭤 봤습니다. 그런데 공통된 의견은 평양은 다시 한번 연구를 해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합당하다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이었습니다. 
그 얘기는 평양이 여러 군데 있었다는 걸 인정하시는 그런 의견들이었거든요. 모든 선생님들이 그 얘기는 다 하셨습니다, 분명히 평양 연구는 다시 해 봐야 된다는 얘기를.

의원질의: 그러니까 대부분 여러 군데였을 것이다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데 분명하게 말씀은 못 하시니까 더 연구를 해 봐야 되겠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복교수:
예, 그런 취지로 이해를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의원질의: 도읍을 이전했을 때 평양이라는 이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는 게, 허 교수님 조금 전에 말씀하셨는데, 원래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에 있었잖아요, 그렇지요? 국내성, 성은 국내성이지요? 그러면 성이 있던 곳이 평양이었나요? 

복교수:
고구려는 삼경제를 합니다. 삼경제를 하는데 그 삼경이 국내성․평양성․한성 이렇게 세 곳인데요. 국내성은 유리왕 때 옮긴 도읍입니다. 유리왕 때 도읍을 옮겼다가 산상왕 때 환도성으로 옮기고, 동천왕 때 평양성으로 옮기고, 고국원왕 때 동황성으로 옮기고, 장수왕 때 평양으로 옮깁니다. 

의원질의: 제가 알고 싶은 건 도읍이 평양이었으니까 평양으로, 이름이 또 그대로 평양이 됐다 이런 말씀을 아까 하셨기에, 그렇지요? 그래서 도읍 이름도, 지명도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셔서 그 종전에 어떤 성이 평양이었는가, 조금 전에 말씀하신 평양성만 평양이었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 거지요. 

복교수:
고구려에서 도읍이 평양성으로 처음 나오는 것은 동천왕 때 옮긴 평양성이 처음이고요. 그 뒤로는 계속해서 평양성으로 이름이 이어집니다 

의원질의: 그러니까 성 이름도 평양성이라는 거고…… 지명도 평양성? 

복교수:
예, 평양으로 지명이 이어지는 겁니다. 

의원질의: 지명도 평양, 국내성은 평양이 아니고? 

복교수:
예, 그렇습니다 

의원질의: 성 이름이었고요, 그때는? 

복교수: 
예, 국내도 지역 이름인데…… 

의원질의: 지역 이름이었습니까? 

복교수:
예, 지역 이름인데 그때는 반드시 큰 지역에 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아마 국내에 국내성이 있었던 걸로 이렇게 판단이 되고 평양이라는 지명은 동천왕 때 처음 나오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후기까지 이어지는 걸로 보입니다.

의원질의: 장수왕 때 도읍 이전한 거는 학계에서도 다 인정하는 거고? 

복교수:
예, 다 합니다.

의원질의: 만약에 ‘평양의 위치가 요양이다’ 이렇게 가정을 하면 고구려의 영토도 달라집니까? 영토는 우리가 아는 고구려 영토랑 변함이 없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복교수:
많이 달라집니다.

의원질의: 영토도 많이 달라져요? 

복교수:
예, 많이 달라집니다. 

의원질의: 더 커집니까? 

복교수:
예,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커집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20,02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91959
6039 [한국사] 베이징에서 발견된 '낙랑국 조선현' 무덤 (16) 양원장 04-28 3633
6038 [중국] 중국 KFC매장 폭행사건 범인이 한국인이라고 모함하… (6) 군기교육대 05-21 3634
6037 [중국] 조선족보다는 중국한족이 그나마 조용한것같습니다.… (6) doysglmetp 06-05 3634
6036 [기타] 다문화 찬성론자들만 보세요 (극 혐오 주의) (12) 애국자연대 10-15 3634
6035 [다문화] 어느 중국유학생과의 대화,,, (9) 내셔널헬쓰 11-30 3634
6034 [기타] 한국의 신화 예맥 05-20 3634
6033 [한국사] 막상 외국나가면 한국인은 몽골인보단 (6) 베재어 06-14 3634
6032 [기타] 식민사학의 억지주장에 대해 (33) 관심병자 12-05 3634
6031 [다문화] 결혼이민자 40명 이상 지방공무원으로 채용한다… 201… (5) doysglmetp 11-24 3635
6030 [한국사]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말이 안 되는 기록들 (… (11) 꼬마러브 05-02 3635
6029 [기타] 짱깨블로그발견 (8) 자기자신 05-12 3636
6028 [중국] 위만은 억지 중국인 … 후한서삼국지서 중국 성 ‘… (19) 니나 03-29 3636
6027 [기타] 발해 황후 묘는 왜 공개되지 못하나? (4) 두부국 08-04 3636
6026 [중국] 중국에 기울수밖에 없는 한국 (12) 철부지 04-19 3637
6025 [기타] 고려 중장기병 (2) 두부국 11-16 3637
6024 [한국사] 세계최초의 민중? 서명운동, 조선시대 만인소 (5) shrekandy 11-30 3637
6023 [기타] 고구리인가? 고구려인가? (17) 두부국 03-02 3637
6022 [일본] 日임진왜란 출병명령서 발견 "조선, 강하지 않다고 … (4) 스쿨즈건0 03-29 3637
6021 [기타] 이번 큰달 사건으로 ^^ 03-11 3638
6020 [한국사] 이징옥의 난 (1) 두부국 09-29 3638
6019 [세계사] 네덜란드의 코리아호 (1) 붉은깃발 08-06 3638
6018 [기타] 한반도에서는 포부가 좁을수밖에없다. (56) 철부지 05-09 3639
6017 [일본] 일본인의 한국 독립 인식, 웃고 갑시다. (10) 해달 06-20 3639
6016 [중국] 중국이 없으면 지구가텅빈거 같이 (30) 마음의소리 06-30 3639
6015 [중국] 헬게이트 열린듯 (6) 김상 07-03 3639
6014 [몽골] 이거 보고도 몽골 똥꼬가 그리 좋으십니까? (13) 성시리 10-23 3639
6013 [중국] 지나의 고서에 나와 있는 .. 인육 등급 (10) 내셔널헬쓰 07-20 3641
 <  511  512  513  514  515  516  517  518  519  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