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는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 하였다.
그 근거가 된 것이 자신이 평안도에서 발굴하였다고 주장하는 점제현신사비.
점제현신사비
1914년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古蹟調査團)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비신(碑身)의 윗부분은 궐손(闕損)되었고, 남은 부분의 높이는 166㎝, 너비는 108㎝, 두께는 13.2㎝이다.
내용
자연석의 한 면을 갈아서 둘레와 돌의 변죽을 따라서 선을 긋고, 줄과 줄 사이에도 세로줄을 그어서 간격을 만들고, 그 안에 예서체(隷書體)로 글자를 새겨 7행의 비문을 써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年四月戊午秥蟬長□□□建丞屬國會陵爲衆□□□□神祠刻石辭曰
□平山君德配代嵩□□□□□佑秥蟬興甘風雨惠閏土田
□□壽考五穀豊成盜賊不起□□蟄藏出入吉利咸受神光
처음에는 연대와 일자가 있는데, 연대는 글자가 깨져서 알 수 없고 일자는 ‘사월 무오’라고 분명히 보인다. 다음에 ‘점제장’이 나오는데, 점제는 당시 낙랑군에 소속된 25개 현(縣)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에 ‘신사’라는 구절이 있고, 운문으로 된 사(辭)에 ‘□평산군’의 구절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비는 점제현의 장이 현민을 위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내용의 글을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곧 “신이 점제를 도와주어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곡식이 풍성하게 잘 되고, 백성이 오래 살고, 도둑이 일어나지 않고, 무서운 짐승들이 나타나지 않고, 나들이를 하여도 다 무사하여 모두가 신의 혜택을 받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 비의 학술적 의의와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① 건립연대 : 연대 부분의 글자가 없어져 건립 연대를 전한시대(前漢時代)로 추정하기도 하고, 또 신망(新莽) 시건국(始建國) 3년(서기전 11), 후한의 원화(元和) 2년(서기 85), 영초(永初) 2년(108), 광화(光和) 1년(178), 광화 2년(179), 경초(景初) 2년(238) 등 여러 설이 있으나, 『후한서』의 장제(章帝) 2년 조와 제사지 제8의 기사로 미루어볼 때 85년설이 가장 타당한 것 같다.
따라서, 이 비는 원화 2년 4월 무오(9일)에 건립된 것이 되므로, 현재 전하는 우리 나라의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② 점제현의 위치 : 낙랑군의 여러 현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는데 이 비의 발견으로 점제현이 지금의 용강임이 밝혀졌다.
③ 점제의 자음(字音) : 제(蟬)는 『한서』의 주에 ‘蟬音提’로 나와 있지만, 이 비의 운문 부분에 제(蟬)와 전(田)을 같은 운으로 쓴 것을 보면 오히려 당시에는 ‘제’가 아니라 ‘선’으로 읽은 듯하기도 하다는 설과 ‘秥’은 黏과 함께 ‘염’으로 읽어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점제라고 읽고 있다.
④ 건립주체 : 비의 재료가 자연석이고, 형태가 고구려비의 전형이며, 문장과 서체가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와 공통된 점으로 보아 고구려 상고(上古)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점제현신사비 [秥蟬縣神祠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에 2천년 동안 서 있던 점제현신사비를 이마니시 류가 발견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하였고 오직 자신만이 한번에 알아봤다는 개가 웃을 황당무게한 주장을 하였다.
봉니(捧泥)
봉니는 고대 중국에서 문서를 운송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보거나 위조하지 못하도록 한 표식이다.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을 묶은 노끈 매듭에 진흙을 덩어리로 만들어 봉한 뒤 진흙 덩어리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봉니에는 관직 이름이나 지명이 찍혀 있어서 그것을 보낸 곳과 보낸이의 관직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니는 문서를 보낸 곳이 아닌 받는 곳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평양 지역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200여 개의 봉니에 낙랑(樂浪)이란 글자가 새겨진 것을 근거로 평양에 한나라의 낙랑군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봉니에 찍힌 '낙랑'은 문서를 보낸 지역명인데, 그런 봉니가 어떻게 낙랑 땅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더구나 평양 땅에서는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
http://gdlsg.tistory.com/1418
서양의 실링왁스
편지를 넣고 중간에 열어보지 못하게 촛농을 떨어뜨린후 도장을 찍는다.
고대의 봉니도 같은 목적으로 편지를 봉한 진흙덩어리에 도장을 찍는다.
봉니가 발견된다는건 편지를 받아본곳이란 얘기다.
편지를 봉하기전에는 그냥 진흙덩어리고,
문장이 찍힐때는 편지를 봉한 이후라는 것.
당시 조선총독부소속 일본 사학자들의 관련 고대사 지식이 아주 얇았다는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