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기보다 근 1,000년이나 후대 시기인 후금~청(산해관 입관이전)의 인구가
300만에서~최대 400만명이었습니다.
면적으로는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현 동북3성과 내몽골 상당부분, 현 러시아령인
연해주와 흑룡강일대까지 싸그리 포함하여 그 정도 인구였고.....
그나마 요동지역의 중국계 한족 + 조선-명나라 원정에서 포로로 잡은
조선인들과 한족들이 입관 이전의 청나라 전체 인구의 근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 후금~청의 주력인 여진족 인구가(건주-해서-야인여진) 통틀어서 100만명 남짓이었고
만주 서부와 내몽골일대의 몽골계통과 흑룡강 주변의 퉁구스계 소수민족은 여진 인구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외몽골일대(현 몽골인민공화국)는 당시 후금~청의 판도에 아직 속하지 않을 때였고.....
참고로 20세기 초반 한반도 7배 면적의 몽골이 독립할 당시의 인구는 70만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고구려와 후금~청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 지역이 한반도 북부지역인데 변수가 가장 큰 부분이긴 하지만...
산업화 시기 이전의 인구증가율이 극히 미미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근 1,000년의 시차라면
동일지역에서 적어도 두 배 가량의 인구증가율은 기록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15~16세기 무렵부터는 남만주일대에서(건주여진의 본거지) 농경도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부양가능한 인구 또한 늘어났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초반의 후금~청나라 초기의 인구가 그 정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금~청 시기보다 거의 1,000년 전의 시기에....
한반도 북부를 일단 제외한다면 만주와 연해주지역은 전역이 아닌 일부를 영유한
한반도 북부제외한 고구려 인구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최대 150만~200만을 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한반도 북부 인구를 더해 고구려 전체 인구를 350만 정도로 보는 것이 그나마
근사치에 가장 가깝게 추정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구려 시기와 청 시기의 기후변화를 간과하셨군요.
발해 멸망 이후부터는 지구적 빙하기로 만주지역의 기온이 너무 내려가서 그지역은 솔직히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했지만 이전은 아니었지요.
부여, 발해가 만주 남쪽도 아니고 중부지역에서 크게 융성했던 이유가 그때는 기후가 훨씬 온화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의 호수가 8만호라고 하니 인구수로는 대략 40만~50만 명을
크게 넘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부여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이 편찬되던 시기가 부여최대판도의 마지노선에
해당하던 시기이고, 이후 시기부터는 선비족과 고구려 등에 의해 침탈,축소된 역사이기 때문에.....
40만~50만 명 내외의 인구가 부여의 최대인구 근사치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발해는 전체영역면에서는 고구려의 판도를 능가했다고 여겨지지만,
인구가 비교적 희박했던 현재의 동북만주와 연해주 방면으로의 판도와 영향력이 확장되었고....
정작 만주일대에서는 비교적 인구가 많은 지역인 요동에 대한 지배력이 불완전했었고....
한반도방면에서는 현재의 황해도전역을 상실했고, 통일신라와의 접경지대인 평안도남부와
함경도남부일대는 신라와의 완충지대였기 때문에 인구유지를 위한 개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발해의 인구를 고구려시기보다 오히려 적은 200만에서 ~ 최대 300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북아 역사 재단에서 출판한 "발해 5경과 영역 변천"이란 책의 62페이지에 보면 상경성의 내외성의 크기와 지역 등으로 산출한 결과 80만에서 12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그곳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역사 축소 왜곡에 바쁜 식민빠들이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중국측 자료에 근거해서 만든 책이니 과장같은 것은 조금도 없겠지요.
하여간 수도에만 그정도 인구가 살았는데 님이 추산하신 인구는 너무 적은 것같네요.
발해 5경 인구만 해도 200만은 훨씬 넘었을 듯
애당초 비판없이 사료 한쪼가리로 부여 인구를 추산하신 것이 촐라롱콘님이시고요, 상경성은 규모가 당나라 수도 장안성에 버금가고 장안성 인구가 100만은 넘을테니 상경성 인구에 대해서는 내외성 크기, 그지역 자연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내린 저 결론이 저로서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조선 한양 인구를 거론하시는데 그때에 비해서 가장 근시대인 고려 개경인구도 최소 50만으로 추산된다고 하는데 조선 한양 인구가 비상식적으로 적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