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金史)》<알로열전斡魯列傳>(권71열전9)에는 요금(遼·金) 교체기에 동경(東京)에서 모반한 옛 발해인이었던 요나라의 비장(裨將) 고영창(高永昌)에 대한 정벌기가 실려 있는데, 고영창은 금(金)나라의 완안알로(完顔斡魯)가 요나라로부터 조산성(照散城;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나 심주부근의 성인 듯)과 심주(瀋州)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로군(斡魯軍)에게 투항하려 하여 그들 사이에는 사자(使者)가 오고간다.
마침 같은 발해인 출신인 고정(高楨)이 항복했는데, 그가 고영창이 항복하려는 것은 진심이 아니고 잠시 알로군(斡魯軍)의 진병(進兵)을 늦추려는 것이라고 하여 알로는 고영창을 토벌키로 하고 진병(進兵)하자, 고영창은 알로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거전(拒戰)하였다.
당시 고영창과 알노군(斡魯軍)은 『옥리활수(沃里活水)』에서 조우(遭遇)하였는데 알로(斡魯)의 병사는 이미 강을 건넌 뒤였다.
즉, 고영창은 『옥리활수에서의 도하(渡河)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이미 금나라 병사가 강을 건넌 후에 도착하여 고영창의 무리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고, 마침내 알로군은 『북으로 진격하여 동경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고영창이 모든 무리를 이끌고 와서 싸웠으나 또 다시 패하여 5천기를 이끌고 장송도(長松島;위치미상)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斡魯進兵,永昌遂殺胡沙補等,率衆來拒.遇于沃里活水,我軍既軍既濟,永昌之軍不戰而却, 逐北至東京城下. 明日, 永昌盡率其衆來戰,復大敗之,遂以五千騎奔長松島.
심주(瀋州)는 원대(元代)에 심양(瀋陽)으로 바뀌는 동일지역이며 모두 지금의 요양지역에서 동북 1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는 곳이다.
물론 『瀋陽』은 『심수(瀋水)의 북쪽』이라는 의미를 갖는 지명이다.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3468쪽) ‘瀋’(‘沈’은 簡化字)에 의하면, 瀋은 수명(水名)으로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심양시(瀋陽市) 남쪽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심양시 동쪽에서 나와 아래로 흘러 혼하(渾河)로 들어간다고 한다. 또 오리하(五里河)、소심하(小瀋河)라고도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 『오리하(五里河)』를 주목해둔다.
또 “요(遼)、금(金)의 심주(瀋州), 원(元)의 심양로(瀋陽路), 명(明)의 심양중위(瀋陽中衛), 구심양현(舊瀋陽縣) 및 지금의 심양시(瀋陽市)는 모두 심수(瀋水)로 인하여 이름된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권15· 산천2·악이화수(鄂爾和水)>.,“金史高永昌率衆來拒遇於鄂爾和舊作沃里活今改水我軍既濟永昌之軍不戰而却. 逐北至東京城下案明志刪去原文沃里二字稱高永昌拒金兵於活水謂即渾河殊誤.”라고 하여 악이화수(鄂爾和水)는 옥리활수(沃里活水)이며 지금의 혼하(渾河)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혼하(渾河)』는 고칭(古稱)이 역시 『심수(瀋水)』이기에 알로(斡魯)가 있던 『瀋水(渾河) 북쪽에 있던 瀋州(후에 瀋陽)』에서 동경성에 있는 고영창을 치기 위해 瀋水(沃里活水)를 건너, 즉 『심주의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東京城에 이른다고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전개된다.
요컨대 『沃里活水』는 지금의 『渾河』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동경을 지금의 『요양(遼陽)』으로 상정(想定)했기 때문에 알로(斡魯)가 동경성(東京城)으로 가는 진군로에 도하(渡河)하는 강인 『옥리활수(沃里活水)』를 남쪽의 혼하(渾河)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서 주목해 두었던 『오리하(五里河)』는 『옥리활수(沃里活水)』와 같은 강으로 『압(鴨)』(국어 훈, 오리일 것이다)의 의미에서 왔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혼하(渾河)가 될 수 없고,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시에 하루 동안 『450리』를 도주하여 닿았다는 『압록수』(지금의 청하淸河)일 것이다.
당시 수많은 대군을 잃은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즉, 양평襄平) 서쪽 수리(數里)에 진주하고 있던 수양제와 합류하여 황급히 도주하였던 것이다.
*《자치통감》<대업大業8년>에 의하면, “7월 壬寅(24일), 살수(薩水)에 도착하였는데 軍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가 뒤에서 후순(後軍)을 공격하여 신세웅(辛世雄) 등이 사망하고 제군(諸軍)이 붕궤되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나머지 장군과 사병이 모두 도망쳐 1日 1夜(하루 낮 하루 밤)만에 압록수에 다다르니 450리를 간 것이었다. ……癸卯(25일)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당시 수양제(隋煬帝)는 요동성(옛 양평) 부근에 있었다.
《신당서》<지리지>에 의하면 안동도호부 남쪽 700리에 박작성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 박작성은 한반도 북부의 압록강 북안에 있던 성(城)이다.
양제(煬帝)는 밤을 지새우며 달려온 우문술군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당일 퇴각해버린 것이다.
살수에 도착한 것은 24일 낮이며 압록강에 도착한 것은 24일 밤, 혹은 25일 새벽이기 때문에 양제는 이 몰살(沒殺)로 인하여 황급히 퇴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문술군이 도착한 곳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라면 700리 길을 더 가야만 양제가 있던 『요동성』부근 지역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양제가 25일 요동성을 출발하기 전에 30만5천의 병력을 끌고 가, 겨우 2천7백인이 살아 돌아 온 지휘자인 우문술에게 제(諸) 물자와 병력을 망실한 책임을 물어 형리(刑吏)에게 형구(刑具)에 붙들어 매는 문책을 가한 점을 보면 확실히 우문술은 양제와 합류하였던 것이다.
우문술이 도착한 압록수를 한반도 북부의 압록강으로 이해하는 이병도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이다.
때문에 그는 《책부원구冊府元龜》<제왕부帝王部·친정親征2>가 살수薩水의 패전敗戰을 『임인壬寅』(24일)이 아닌 『임오壬午』(4일)로 기록한 점을 들어, “『壬寅』說은 지리상地理上 거리에 따르는 날짜의 허비虛費로 보아 불가不可하므로 『壬午』설說을 취함이 온당할 것 같다.”〔1983, 이병도 역주譯註 《삼국사기》(上), 을유문화사, 366쪽, 주注36.〕고 하는 것이다.
『壬午』설을 취하면 21일 만인 『게묘癸卯』일에 반사班師한 것이 되는데, 《책부원구冊府元龜》는 『1日1夜 450리』라는 살수薩水남쪽에서 압록수(鴨綠水)까지의 퇴각 소요기간과 거리를 기록하지는 않고 단지 『敗續於薩水…還亡者二千餘騎.』라고만 적고 있다.
그러나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전에 편찬(636년)된 《수서隋書》<우문술전宇文述傳>에 의하면,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라고 기록되어 《책부원구冊府元龜》보다 늦게 편찬된 《자치통감》의 기록과 동일하다.
따라서 『薩水에서 鴨綠水까지 1日1夜, 4백리』라는 것은 《자치통감》이 지어낸 것이 아닌 《수서隋書》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기록인 것이다.
양제煬帝가 요동성 서쪽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대군大軍 30만 중에 고작 2천여가 생환하였다는 사실은 언제 요하가 폭창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만약 《책부원구》의 『壬午』(4일)을 취한다면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하고, 『癸卯』(25일)까지의 기간 동안 한가하게 요동성에서 기다린 것이 된다.
30만의 大軍을 잃고도 요하 동쪽에서 약 20일을 기다릴 만큼 양제의 사정은 한가하지 않았다.
물론 우문술이 도착한 곳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라고 하더라도 요동성까지 700리길을 더 달려가야 하지만, 생사가 걸려 있는 우문술 등은 추가된 700리길도 1-2일 사이에 주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양제는 우문술 등이 요동성에 도착한 후에도 15일 이상을 더 체류滯留한 것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우문술 등이 도착한 압록수도 한반도 북부의 압록강일 수는 없다.
필자는 이 압록수鴨綠水가 바로 옥리활수沃里活水, 즉 『오리하五里河』일 것이며 지금의 철령시를 흐르는 청하淸河일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살수薩水는 지금의 무순시撫順市 동쪽의 대화방수고大伙房水庫로 흘러드는 소자하蘇子河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알로斡魯는 심주에서 북쪽으로 간 것이지 남쪽으로 향한 것이 아니다.
<알로열전斡魯列傳>은 『옥리활수沃里活水』를 건넌 후에 『逐北至東京城下』라고 기록하여 심주瀋州에서 동경성으로 향하는 금군金軍의 진군로를 명백히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동경성(漢 襄平)은 심주 남쪽의 오늘날 요양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주 북쪽의 『沃里活水』(지금의 청하)를 건너 북쪽으로 향하는 모처某處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필자가 양평성을 노성老城 부근지역에 비정하는 것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자세한 것은 따로 해설), 무엇보다도 오늘날 발견되는 연북장성 주향선과 같은 위도 상에 소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