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오래 전부터 품은 단순한 의문과 흥미에서 비롯됐습니다. 현대의, 요즘 사람들은 단지 두세 정거장 거리도 걸어서 다녀온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차를 탈 거리라 여기죠.
그런데 과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교통편이 좋지 않았던 육칠십 년대만 해도 왕복 이삼십 리는 보통 걸어다녔고, 편도 일백 리 거리도 걸어서 다니는 같은 생활권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원주, 제천, 단양, 영주(경북), 영월, 충주, 음성 등이
한 생활권이어서
이 범주에서 인적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어릴 적에 백범일지를 보면서 동학꾼들이 전국팔도를 이리저리 다니며 활동하는 것을 보고서 어찌 저랬을까 이해가 안 됐는데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이 세대분들 말씀을 들으니 이해가 되더군요
부산동래에서 걸어서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간 것처럼 지금 우리는 범상으로 여기지 않을 거리를 범상으로 걸어다니며 생활했던 것입니다
다음은 고대인들의 거리 감각이 엿보이는 두 가지 사례입니다. 하나는 388년, 다음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누적 정보입니다
좌측 몽골 지역의 경로는 388년, 북위 도무제의 고차(고거) 정벌 경로로서, 기록에 근거한 추정 경로이며
우측은 5세기 말에서 6세기까지 북위와 동위를 방문한 물길 사신의 이동 경로로서, 역시 기록에 근거한 추정 경로입니다
물길의 경우 "낙양에서 5천 리"라고 위서와 북사에 명기돼 있으며 그 이동 경로 역시 상세합니다
오차는 분명히 있으나 도무제의 고거 정벌 경로 또한 편도 사오천 리에 근접합니다
북위는 왕복 1만 리 경의 거리를 정벌하고 다닌 것이고, 물길은 왕복 1만 리 거리를 수시로 다녀간 것입니다
심지어 물길 사신의 경우 조아하에서 영주까지 근 2천 리 거리를 도보로 이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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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대뿐만 아니라
청동기 시대, 신석기 시대의
인적 교류의 실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의 하나로서
작성되었습니다
신라 황금보검이 근 2만 리의, 옛 스키타이 지역과 관계가 있다거나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한반도인들이 연해주와 캄차카를 거쳐 알라스카까지 고래잡이를 다녀왔다 하는
비상한 사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감각연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