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서기 605년, 수나라의 거란 정벌과 유성의 고구려 국제교역 시장
앞서서
한중 학계 통설에서는 북위 이래 당나라 시대까지, 5세기부터 9세기까지 북위 시절 잠시 현 하북성 보정시 수성현으로 영주가 남영주라는 이름으로 교치된 것을 제하고 줄곧 현 요녕성 조양시에 있던 유성현에 영주 치소가 위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수나라의 영주가 위치한 요서군은 속현이 1개로 영주의 치소가 위치한 유성현이며 그 인구가 751 호로 4천여 명 내외에 불과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수나라 요서군의 속현과 인구 실태는 한중 학계 통설에서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이번 03차 추적에서는 605년, 거란이 영주를 약탈하자 수나라의 통역관 위운기가 절도사가 돼 동돌권의 계민가한으로부터 2만 기의 병력을 빌려 상인으로 위장하여 고구려의 국제교역시장이 있던 유성으로 가는 것으로, 당시 고구려 국경에 위치하며 복속돼 있던 거란을 속여서 국경에 들어온 후 야음을 틈타 거란 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4만 명을 포로로 삼은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학계 통설에서도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의 긴장관계와 그 전쟁사를 설명하며 빠짐없이 거론되는 것으로 동시에 고구려가 운영하던 국제교역시장의 규모를 가늠하는 척도로 역시 사용되는 사실입니다. 즉 학계 통설의 입장에 선 사람이든 그에 반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든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부정하지 못할 사실을 토대로 수나라 영주의 위치, 그리고 학계 통설에서 의무려산을 서한계로 삼는 고구려 최대강역 비정에 의문을 표하고자 합니다
다음은 제가 직접 해석한, 수서 위운기 열전의 해당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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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이 영주를 약탈하자 위운기는 돌궐병(계민가한의 2만 기 병력)을 이끌고 그들(거란)을 토벌할 것을 (황제에게) 아뢰어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위운기는 (2만 기의 병력을) 20개의 진(둔)으로 나누어 떨어뜨렸고 진끼리 연락하도록 하여 4열로 움직이게 하며 명령하길
“북을 치면 나아가고, 뿔을 불면 멈춰라.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
하고
그 훈련을 여러번 반복하여 깨우치게(숙달되게) 하였다.
단 한 사람이라도 령을 어기면 즉시 목을 베어 복종케 하니 이에 돌궐 추장들이 알자(위운기)를 섬기며 모두 무릎을 꿇고 나아가며(조아리며) 감히 (위운기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 했다.
會契丹寇營州,詔雲起護突厥兵討之,啟民可汗以二萬騎受節度。雲起使離為二十屯,屯相聯絡,四道並引,令曰:「鼓而行,角而止,非公使,毋走馬。」三喻五復之。
既而紇斤一人犯令,即斬以徇。於是突厥酋長入謁者,皆膝而進,莫敢仰視。
처음에 거란이 돌궐을 섬기며 서로 가까웠으므로 운기가 (돌궐 기병을 이끌고 거란 지역에) 다달음을 알지 못 했다.
이윽고 (거란) 경내에 들어가서 감히 수나라가 시키는 것을 발설할 시 목을 베겠다 하고 돌궐인으로 하여금 유성의 고려시장에 가는 것처럼 (거란인들에게) 속여서 말하게 하니 거란은 의심하지 않았다.
始,契丹事突厥無間,且不虞雲起至。
既入境,使突厥紿云詣柳城與高麗市易,敢言有隋使在者斬。契丹不疑。
이에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다가 적(거란)의 근거지(營)에서 100리 떨어졌을 때 밤에 진(상인으로 위장한 돌궐기병)을 되돌려 야음을 엄폐로 삼아 거란을 공격하여서 거란남녀 4만명을 포획하였으니
거란 여자와 가축 및 재물의 절반은 돌궐에게 주고 거란 남자는 모두 살해한 뒤에 남은 무리는 돌려보냈다/남은 무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因引而南,過賊營百里,夜還陣,以遲明掩擊之,獲契丹男女四萬,以女子及畜產半賜突厥,男子悉殺之,以餘眾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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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수서 위운기 열전에서 보이듯
거란이 영주를 약탈한 직후 수나라는 당시 수나라의 세계질서에 복속되어 가던, 수나라의 지지를 받던 동돌궐 계민가한에게서 2만 기의 병력을 빌려 상인으로 위장시킨 후 국경(돌궐과 고구려의 경계로 이 경계 근처에 거란이 고구려에 복속돼 살고 있었음)을 넘었고, 야음을 틈타 거란의 본거지를 파괴하는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성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깊은 의문이 듭니다
1) 수나라 영주와 유성이 동일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
2) 수나라 영주가 있었다는 유성에 학계 통설과 달리 고구려 국제교역시장이 있었다는 것
2만 명의, 상인으로 위장한 돌궐 기병이 유성의 고려시장으로 향하는데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 당시 유성의 고구려 국제교역시장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일단은 이렇게 정리하는 게 합당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1) 만약 유성이 학계 통설대로 현 요녕성 조양시라면 이곳까지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
2) 따라서 학계 통설대로 의무려산 어귀까지 간신하게 고구려 영토의 서한선을 표시하는 것은 부당하고 부정확하며, 현 요녕성 조양시까지 고구려 영토로 표시해야 한다는 것
수나라의 605년 거란 정벌과 유성의 고려시장을 두고 학계 통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 598년 영양왕의 수나라 요서에 대한 선제 타격과 수나라의 1차 고구려 원정의 결과로 수나라는 영주가 있던 유성지역의 지배권을 잃었다
2) 그 결과로 유성에 고려시장, 즉 고구려 국제교역시장이 생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3) 때문에 수나라는 2차 원정에서 현 북경시인 당시의 탁군을 원정군의 집결지이자 출발지로 삼았다
그러나
강단 주류 학계의 설명이 이러하더라도, 이러하다면
앞서 제가 정리한 대로 역시 늦어도 600년부터 수나라의 제 2차 고구려 원정이 개시된 612년까지는
(학계 통설대로 유성이 현 요녕성 조양시에 있었다고 한다면) 현 조양시까지 고구려 영토로 표시해야 합당할 것입니다
다음은 이 사건과 당시 수-고구려 관계에 대한 학계 통설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김용만 박사의 글입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919&cid=59016&categoryId=5902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2927&cid=59016&categoryId=59023
다음은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제시하는 수나라 당시의 동아시아 판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