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제헌헌법
1997년 12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사형수가 17년 만에 대통령이 된 그날, 나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어설픈 내란음모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흐뭇해했다. 그리고 또 17년이 지난 6월 30일 나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갔다. 세 시간이 넘게 진행된 증인신문에서 변호인은 우리나라에서 내란조작사건의 역사, 비합법 지하조직의 성격,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 등에 대해 질문했고, 검사는 과거 내가 쓴 글 등을 통해 내가 사상적으로 편향된 인물이라 증인으로 부적합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썼다. 내란문제에 대해서는 <한겨레> (“각하들도 피하지 못한 내란의 추억”, 2014년 2월 15일자)에 자세히 쓴 바 있다. 이른바 RO의 실체와 관련된 비합법 지하조직의 행태 문제는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100명이 넘게 모여 얼굴 보며 수련회 갖는 그런 비합법 지하조직은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길게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단,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는 비단 내란음모사건 뿐 아니라 원내 제3당인 통합진보당의 명운이 걸린 정당해산심판문제와도 깊이 관련된 문제이기에 6월 30일의 증언내용을 조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1948년의 제헌헌법을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건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담보하는 역사적 문건인 제헌헌법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면서 그 주역들이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국민들과 맺은 숭고한 협약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시민들은 제헌헌법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아는 게 없다. 아마도 일반적인 시민들이 제헌헌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제헌절이 7월 17일 이라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일반 시민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사 연수에 가서 사회 선생님들이나 역사 선생님들께 여쭈어 봐도 별 신통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선생님들조차 제헌헌법에 대해 배워본 적도 가르쳐 본 적도 없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담보하는 제헌헌법이 이런 천덕꾸러기가 되었을까? 왜 학교에서는 제헌헌법을 가르치지 않고, 왜 수능시험은 제헌헌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제헌헌법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제헌헌법의 구절 구절을 지금 들여다보면 죄다 빨갱이 소리이기 때문이다. 제헌헌법의 내용은 현재 내란음모죄로 걸려들어 정당해산심판이 청구되어있는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비해 훨씬 급진적이다.
제헌헌법의 전문을 살펴보면 몇 년 전 뉴라이트들이 불러일으킨 ‘건국절’ 논란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헌법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으며, 1948년의 정부수립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이고, 1948년의 정부수립은 대한민국을 ‘재건’한 것으로 명쾌하게 규정한 것이다.
기업의 이익은 노동자와 노나 먹어라
제헌헌법 제18조는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현행헌법에도 ‘보장’되어있다는 노동3권은 제헌헌법에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떼거지로 모이고, 떼거지로 우기고, 떼거지로 자빠질 수 있는 권리인 노동3권은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헌법적 권리로 인정되고 있다. 헌법 1조 1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나라이다 보니,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고 해서 이 권리가 제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2014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의 단결권은 최근 해직교사들을 조합원으로 품었다가 노동조합으로서의 법적지위를 상실한 전교조 사례에서 보듯이 극도로 침해당하고 있다. 단체행동의 자유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하면 금방 날아오는 손해배상과 가압류에 의해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 감옥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싸우던 노동자들도 듣도 보도 못한 수십억의 거액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통보 앞에 무너져 내리고 만다. 손배 가압류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도 한 둘이 아니다. 최근 ‘노란봉투’ 캠페인으로 손배 가압류로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와 그 가족들과 손잡고 가자는 움직임이 뒤늦게나마 일어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구성원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4년 <임시헌장>에서 인민의 자유와 권리의 하나로 파업의 자유를 보장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은 노동3권도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지만, 제헌헌법 18조는 노동3권이 아니라 노동4권을 보장했다. 노동3권에 더하여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를 보장했던 것이다. 네 번째 권리 ‘이익분배균점권’은 쉽게 풀이하면 기업에 이익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들이 그 이익을 나눠먹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이익은 통상적으로 자본가의 것이다. 이익을 많이 거둔 자본가들이 기분 좋다고 노동자들에게 시혜적으로 보너스를 주면 모를까, 영업이익은 노동자가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제헌헌법은 그 이익을 노동자들이 노나 먹을 권리를 신체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 조항은 제헌헌법을 기초한 현민 유진오 박사가 자부했듯이 대한민국 헌법 이외에 어느 나라의 헌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며, “18-19세기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만능시대에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규정”(<헌법해의>: 11)이었다.
도대체 제헌헌법을 누가 만들었기에
도대체 제헌헌법을 누가 만들었기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항, 그 존재만으로 “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운 성격을 갖게” 하는 조항(<헌법해의>: 11)이 들어간 것일까? 혹시 제헌헌법을 좌파들이 모여 만들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좌파는 5ㆍ10선거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았고, 중간파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제헌헌법은 우파들만 모여서 만들었다. 이익분배균점권을 제헌헌법에 집어넣을 것을 주장한 세력은 이승만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대한노총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했다기보다는 ‘전평’ 등 좌파 노동운동세력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노동단체의 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승흠에 따르면 노동자의 이익균점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주장을 한 정치지도자는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자본과 노동이 평균이익을 누리게 하자는 주장”을 “제헌국회의 헌법심의 중에서 그것도 이익균점권 논의에서” 한 것이다. 아무리 이승만이라 한들 국민생활의 균등한 보장을 추구하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직후 좌파 노동운동세력은 장기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구했겠지만, 당장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공장의 정상적인 가동을 목표로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에 힘을 쏟았다. 제헌국회에서 가장 강력히 이익분배균점권을 주장한 문시환에 따르면 이미 여러 기업에서 기업가들이 이익의 분배를 솔선해서 실시하고 있었다. 우파 노동운동세력도 이미 자주관리와 이익의 분배를 실현하고 있는 현장의 열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이미 여러 사기업에서 기업가들이 솔선해서 노동자들과 이익을 나눠 갖는 상황이 이익분배균점권으로 실현된 것이다. 사실 대한노총 출신 일부 의원들은 노동4권을 넘어 노동자의 경영참여권을 포함한 노동5권을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대한노총 위원장으로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은 이익분배균점권을 “대한민국헌법 이외에 세계 어느 나라 헌법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일대 창견일 뿐 아니라 인류평화의 암이요, 세계적 난문제이니 노자대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 개 관건”(<건국이념>: )이라고 찬양했다.
제헌헌법 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3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불어 이 책이 1백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의가 무엇인지 꼭 하버드대학 교수에게 물어보아야 했을까? 우리 제헌헌법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사회 정의를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모든 국민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상태를 사회정의가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으면 돈 없어서 못 먹고, 돈 없어서 못 배우고, 돈 없어서 아픈데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뜻이다. 유진오는 그러한 사회를 한편에서는 좋은 밥을 먹고 따뜻한 옷을 입는 국민이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에 신음하는 국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킨다 함은 “최저생활을 확보한다는 의미보다는 넓으며 생리적 최저생활을 확보하는 동시에 상당한 정도의 문화적 생활을 확보할 것을 의미”했다. (<헌법해의>: 178)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도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진보세력보다 더 빨갰던 원조 보수들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고, 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87조의 중요산업 국영ㆍ공영 원칙에 대해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이 조항은 소련이나 전시 중화민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헌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정으로 “우리나라 헌법의 진보성을 표현한 규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규정만으로 볼 때에는 우리나라는 국가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채용하였다 할 수 있다”(<헌법해의>: 183) 고 주장했다.
제헌헌법의 이와 같은 규정은 “물 전력 가스 교육 통신 금융 등 국가 기간산업 및 사회 서비스의 민영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공유화 등 사회적 개입을 강화해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며 공공성을 강화한다”고 규정한 통합진보당 강령 11항과 비교해볼 때도,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의 상당수가 이미 재벌의 손에 장악된 오늘날의 현실과 비추어볼 때도 대단히 급진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유진오의 지적처럼 일견 사회주의적으로까지 보이는 급진적인 내용을 왜 우파들이 제헌헌법에 담았던 것일까?
첫째,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볼 때 한반도에 존재하는 자본의 94퍼센트가 일본인 또는 일본 제국주의 국가기관 소유였다. 94퍼센트라면 중요산업 정도가 아니라 웬만한 산업은 다 적들이 남기고 간 재산, 즉 ‘적산’(또는 귀속재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적산은 조선사람 전체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당연히 조선사람 전체의 소유가 되어야했다. 영어 잘한다고, 미국 유학 갔다 왔다고, 얼른 이름을 존이나 메리로 바꾸었다고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 독립운동시기 좌ㆍ우익을 막론하고 주요한 정당과 단체는 모두 해방 후 새롭게 건설할 국가는 마땅히 중요산업의 국유 또는 국영을 주장했다.
셋째, 국내의 자본가 계급이나 우익 인사들 입장에서 볼 때 중요산업 국유화가 당장 자신들에게 타격을 주는 일은 아니었다. 주요 기업의 대부분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제국주의 국가기관에 의해 국영 내지는 공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일본인 개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몰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산업을 국영화한다 해도 한국 국적을 가진 개인이 기업을 무상 또는 유상으로 강제 매상당하는 일은 일어날리 만무했다. 유진오는 “헌법에서 중요기업을 국영으로 한다 하면 우리나라 경제 체제에 중대한 변혁을 가져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아무런 변혁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고” 라는 식으로 한민당의 김성수를 설득했고, 김성수도 이에 쉽게 동의했다고 회고했다. (<헌법기초회고록>: 30)
넷째, 중요산업 국유화라는 시대적인 요구를 거역하고 특정인에게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적산 불하를 강행할 경우 민중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우익인사들의 입장에서는 공산혁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민중들의 급진적인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지개혁과 국민 만들기
제헌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라고 되어있다. 이는 지주의 토지를 비록 유상이지만 강제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다. 당시까지 토지가 가장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던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수백 년 간 지배층으로 군림해 온 지주층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사 연구가 처음 시작된 1980년대에는 이북에서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된 토지개혁과 비교하여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남쪽의 농지개혁이 제한된 의미만을 갖는다고 저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계급으로서의 지주가 완전히 소멸했다. 또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엄청난 교육열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주대환) 더구나 한국전쟁의 향배와 관련하여 본다면 농지개혁의 의미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북쪽이 일찍이 1946년 3월에 토지개혁을 단행한 것은 남쪽의 우익세력에게 커다란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을 보면 날 때부터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민학교’를 나왔고, 매주 애국조회를 했고, TV가 시작할 때도 끝날 때도 애국가를 들었고,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쳐온 사람들이었다. 반면 1948년 당시 38도선 이남의 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갖지 못했다.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조선이나 대한제국 시절에 태어났거나,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당시는TV방송은 없었고 라디오의 보급도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문맹이 80퍼센트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신생, 그리고 분단 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에게 농지개혁은 ‘국민만들기’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북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남쪽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보수 우익인사들은 공산혁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당시 대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급진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예로 제헌의원 정해준은 1948년 7월 3일 열린 헌법안 제2독회에서 헌법에 근로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명문화하지 않는다면 38도선 이남에서 ‘반동자와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혹은 “좋지 못한 일에 가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땅부자 김성수도 동의한 농지개혁
땅을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농민들에게 했던 오랜 약속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은 토지혁명이나 토지 국유화나 같은 급진적인 토지제도의 개편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이것은 농민이 전체 인구의 80퍼센트에 육박하는 가운데 독립운동을 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농민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독립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어디 경치 좋은 곳에 소풍가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걸어야 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만약 농민들에게 독립 후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농민들이 독립운동에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농민들의 참여는 소작료를 조금 낮춰주는 정도로는 끌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인 지주의 땅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의 땅까지 나눠준다는 약속은 불가피했다.
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세력의 결집체인 한국민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인촌 김성수는 그 자신이 당시 조선 팔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땅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성전문 시절부터 교주와 교수로 김성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유진오는 헌법조항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를 만나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라며 결국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헌법기초회고록>: 30) 알토란같은 농지를 다 내주어야 한다니 김성수 입장에서 무척이나 속이 쓰렸겠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칭 ‘애국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 인물이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조선일보>의 방응모가 친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해방 후 어느 독립투사도 일제가 폐간시켜버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복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험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만해 한용운 같은 많은 독립지사들이 풍족하지는 않아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던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사주 일가들이 김성수나 방응모가 보여주었던 아량과 금도를 반의 반만 보여줬어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그렇게 지탄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자칭 ‘애국보수’들은 정말 자기 조상의 역사부터 다시 공부해야한다. 한국 보수의 원류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같은 인간 백정 일제 앞잡이들이 아니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질 줄 알았던 우당 이회영 등 6형제, 인촌 김성수, 계초 방응모 같은 분들이 보여준 모범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보수의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자본주의를 폐기한 제헌헌법
헌법을 처음 만들 당시 한국에는 이렇다 할 헌법 전문가가 없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 공법학 교수였던 유진오는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공법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진오는 미군정의 조선인 기구인 남조선과도정부의 법전편찬위원회, 한국민주당, 이승만의 영향 하에 있던 행정연구회 등 “5ㆍ10선거를 추진하던 3대 세력 전부로부터 단일헌법초안 작성을 부탁”받게 되었다. (<헌법주체회고록>: 10~31) 제헌국회는 유진오로부터 제안 설명을 듣고 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토대로 한 조항 한 조항 축조 심의해가며 제헌헌법을 완성했기에 유진오가 쓴 <헌법해의>는 제헌헌법에 관한 독보적인 권위를 갖는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이기도 했던 유진오는 법제처장 재임 중 발간한 <헌법해의> 초판에서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이 놀라운 표현은 수정판인 1952년의 <신고 헌법해의>에 가서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국가 체제에 편향함을 회피하고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의 원리를 아울러 채택”한 것으로 완화되기는 했지만, 제헌헌법에 따른 대한민국의 초기 경제질서가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따른 것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애국보수’들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제헌헌법이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깜짝 놀랄 정도로 급진적인 색깔을 띨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행기의 특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막대한 적산은 우익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물질적 양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이익분배균점권을 강력히 주장한 문시환이 “해방 후에 우리가 경제 상태는 노자와 협조될 수 있는 큰 중요한 원인”으로 적산을 꼽았다. 이는 단독정부 수립 전후 정치엘리트들이 정치적으로 격렬했던 계급투쟁을 경제에 대한 국가기구의 계획과 통제를 통해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제헌헌법이 갖고 있었던 진보적인 조항도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했으며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