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화하족의 뿌리깊은 역사왜곡,
그 주범들인 공자,사마천,주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5회 연재 예정인데 내용 일부를 먼저 옮깁니다.
(펌글)
공자는 역사 사기꾼의 선구자였다.
공자의
조상은 은(殷)나라이나 공자는 주(周)나라 사람이다. <주서(周書)>는 공자 시대의 차이나족의 역사이다. <상서(商書)>는
동이족 은(殷)나라의 역사이다. 은의 문화는 찬란하고 주는 보잘 것 없다. 무엇보다 시간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차이나족들에게 은나라가
주나라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은나라보다 앞선 나라가 필요하였다. 바로 전설 속의 나라, 하(夏)와 요순을 은나라 위에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하나라의 전설을 모아 <하서(夏書)>라 하여 <상서(商書)> 위에다 올려두고는 덤으로 요순의 역사를
<우서(虞書)>라며 맨 꼭대기에 올렸다. 이들이 전설을 입맛대로 뜯어 고치어 <하서(夏書)> <우서(虞書)>를
만들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드디어
주나라는 요순과 하우의 후손임을 선언하였다. 그래서 <우서>, <하서>, <상서>, <주서>의 시간적
체계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 짓을 누가 하였는가. 공자가 바람을 잡고 공자 후대의 모든 차이나 사가들이 일사불란하게 공모하였다. 후에 밝히겠지만
요순과 우는 동이의 사람이었다.
공자가
바람 잡은 증거가 있는가. 있다. 《논어》를 펼쳐보자.
공자는
‘주(周)는 은(殷)을 이었으며 은(殷)은 하(夏)를 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말이 《논어》에 3번이나 더 나온다. 공자는 귀에 못이
밝히도록 역사적, 문화적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실제적으로 주가 은을 이었다면 이런 강조는 필요하지 않다. 공자는 요새 말하는 이데올로기, 즉
통치 질서 확립에 역사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인식한 사람이었다. 이와 관련된 글이 있는지 《논어》를 들춰보자.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운 대로 돌아간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조상의 추모하라. 이를 통해 백성들을 통치 질서 속으로 순치시키고자 하였다. ‘먼 조상의
추모’를 확대하면 국사(國史)가 된다.
서구의
중세는 기독교의 신이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였다. 17-8세기에는 기독교와 단절하고 민족 국가가 만들면서 민족국가의 이념을 확립한다. 자유,
사랑, 평등 등이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고 이를 실현해주는 민족 국가가 영국, 프랑스 등이 등장한다. 이런 서구적 잣대로 고대 동아시아에는 민족
개념이 없었다는 먹물들이 있다. 얼빠진 소리이니 논외로 치고 나중에 논박한다. 동아시아의 차이나족들에게는 ‘예수’라는 신의 역할을 한 이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이었다. 호고(好古), 상고(上古), 태고(太古). ‘유구한 조상의 소유자’에게는 ‘그렇지 못한 자’가 신복한다고
믿었다.
공자는
이런 방식으로 주나라가 은나라보다 오래된 뿌리를 가진 나라임을 구성(construction)하였다. 그렇다면 《서경》의 첫째 역사인
<우서(虞書)>의 요순과 둘째 역사인 <하서(夏書)>의 하(夏)나라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실증사학에서는
은(殷) 왕조 까지만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공자의 거짓말에서 출발한 나라의 유물이 존재하겠는가. 더구나 은 왕조 이전의
차이나는 동이의 나라였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쏟아지고 있다. 동이(東夷)와 서주(西周)가 바른 표현이지만 실재하지 않았던 나라의 전설을 두고
동이(東夷)다 서하(西夏)다 따지는 것은 모양새가 우습다. 그러나 전설 속에 녹아 있는 문화는 동이의 모습이다. 《맹자》에는 순의 아우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바로 동이나 북적의 형사취수이다. 또 《맹자》는 순은 동이지인이라고 말하였다. 순(舜)은 우(禹)에게
선양한다. 그러므로 우가 세운 하(夏)나라가 있었다면 동이의 나라 아니겠는가. 사마천은 《사기》 <흉노열전>에서 흉노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匈奴 其先祖 夏后氏之苗裔也)라고 하였다. 사마천의 단순한 거짓말인지 차이나 천하를 발로 다닌 후에 얻은 결론인지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우(禹)와 요순이 동이인임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가짜
역사는 가짜임을 아는 이들에게 부정 당한다.
차이나의
소설가 호적(胡適, 1891-1962)이 북경 대학에서 강의할 때였다. 중국 철학사 강의에서《서(書)》가 아닌 《시경(詩經)》을 교재로
삼았다. 대담하게도 요, 순, 하, 상 시대를 버리고 주 선왕(宣王 BCE 827-781재위) 후의 것부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머리속에
삼황오제로 꽉 차 있던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顧詰剛, 《古史辨》 제1책, <자서>, p. 36).
공자는 남의 나라 역사를 자기 나라 역사에 덧붙이고는 의미를 부여하고 제자들이 암송케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신창(新創)하지 않고
법고(法古)하였다는 말을 좋아하였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니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새겨 보자. ‘온고지신’은 지신(知新)이 중요히 여기나
온고(溫故)에 핵심이 있다. 내 말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고 옛것을 익히었다. ‘술이부작’은 전하여 내려오는 말들을 그대로 적었지 새로이
창작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온고(溫故)와 전술(傳述)은 공자 인문학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왜 이를 강조하였을까. 역사사기꾼임을 감추려는
자기변명이었다. 공자가 이런 태도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를 묶었으니 후학들이 무엇을 못하랴. 차이나 지식인들의 민족사 구성은 대담하고
뻔뻔스러워진다.
공자의 역사관 - 차이나는 높이고 동이는 멸시한다(尊夏?攘夷)
공자는
《논어》에서 문화차별성 발언을 한다. 이적에게 임금이 있어보았자 차이나족(諸夏?)에게 없는 것보다 못하다(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필자는
차이나족을 주(周)로 보지 하(夏)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제하(諸夏)에 물음표를 달아 두었다. 독자들은 이를 염두에 두고 읽었으면
한다. 존하양이(尊夏攘夷)는 존주양이(尊周攘夷)로 고쳐서 이해해야 타당하다.
존하양이(尊夏攘夷)는
주초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정책에서 나왔다고 한다. 국내 학자(신승하)가 《중국사학사》에서 인용한 차이나 학계의 견해를 소개한다.
주의
무왕(武王)이 상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주공 때에 동방으로 발전하여 원래 서쪽에 있던 주가 그 세력 범위를 동방으로 확대하여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주(商․周)가 일체화 되고 제하(諸夏)의 관념이 생겼으며, 제하의 범위 바깥 지역을 만이(蠻夷)로 간주하였다. 주
왕실은 천하의 중심으로 왕은 천자로서 제후를 다스리고 외족의 침입으로부터 제후를 보호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양이(攘夷)는 주왕의 몫이었다.
제후도 주 왕실의 병풍노릇을 하며 왕실로부터 보호받는 대신에, 주 왕실에게 조공의 의무를 다하여야 하는 존왕(尊王)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후
제하의 범위가 확대되어 일부 만이가 제하의 범위에 들어왔지만 중국 주변에는 여전히 이적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양이의 사상은 그대로 존재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사상은 중국의 사서에서 중국의 세력이 강성할 때는 숨어 있고 중국의 국력이 쇠약하였을 때 돌출되고 있다. 이러한 논리 위에 사서의
기록에는 존왕양이라는 하나의 준칙이 되었다(李宗侗, 《史學槪要》, 正中書局, 民國 57년, p. 3/《중국사학사》 p. 11인용)
《서(書)》에는
제하(諸夏)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는다. 《논어》에 처음 나온다. 공자의 존하양이(尊夏攘夷)는 주나라가 ‘동방으로 나아가자’는 차이나족의 이념을
한 마디로 정리해 준 슬로건이었다. 공자가 제주(諸周)라 하지 않고 제하(諸夏)라고 하였다. 뻐꾸기 근성 아닌가. 나의 역사를 높이기 위해서
남의 역사를 훔친다. 그런 자가 나를 높이고 남을 낮춤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가당착이 되고 말았다. 거짓이 밝혀지고 나니 남의 역사가 더
유구하였다는 강조를 한 셈이다.
공자의
역사관이란 휴머니즘이다 실증주의다 하는 합리적 관점과 무관하다. 오직 “나를 높이고 남을 낮추라, 역사사기꾼”이라도 괜찮다. 우리가 공자에게
빼앗긴 것은 무엇인가. 동이의 역사이다. ‘은(殷), 하(夏), 요순(堯舜)’을 빼앗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