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중인 요하문명(홍산문명) 옥제기와 상형문자
1980년대에 만주 요하(遼河, 중국명 랴오허) 서부지역에서 신석기문화 유적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다.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는 서기전 7000년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이나 장강문명(長江文明)보다 이른 시기여서 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유적지에서 확인된 문화를 일괄해서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고 부른다. 요하문명은 신석기문화에서 청동기문화에까지 이어지면서 동북아시아의 중심문명으로 자리 잡았다.
1)소하서문화: 가장 이른시기의 문화로, 1987년 내몽고 적봉시(赤峰市)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오한기(敖漢旗) 소하서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흙으로 만든 얼굴상(陶塑人面像)이 출토되고 반지혈식(半地穴式)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이는 서기전 7000년까지 올라가는 동북아시아 최초의 신석기문화 유적으로 황하유역의 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는 2500년 이상, 장강 하류의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보다는 2000년 이상 앞선다. 이 문화는 흥륭와문화, 사해문화(渣海文化), 부하문화(富河文化),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홍산문화(紅山文化)로 이어진다.
2) 흥륭와문화: 1982년 대릉하(大凌河)의 지류인 망우하 상류 우측 연안 구릉에 위치한 흥륭와촌에서 발견되었다. 서기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으로 현재의 중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거주지 이다.
여기서 발굴된 옥귀걸이는 세계 최고(最古)로 확인되었고, 특히 이 옥귀걸이는 단동(丹東)에서 가까운 요녕성(遼寧省) 수암현에서 나는 수암옥으로 만들어졌다.
즉, 이미 내몽골과 요동(遼東) 간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와 유사한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되었는데, 문암리 유적지는 서기전 6000년 이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흥륭와문화의 옥귀걸이가 비슷한 시기에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옥귀걸이는 시차를 두고 일본과 중국 중원지역에도 전해졌다. 흥륭와문화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도 발견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계 문화지역에서만 발견되며 중국의 중원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반도 최고(最古)의 문암리유적과 이보다 약간 늦은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유적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옥귀걸이와 빗살무늬토기의 분포현황을 보게 되면, 요하문명의 주도세력은 북방계로서 중원지역의 황하문명이나 장강문명을 주도한 남방계와는 다르며, 만주와 한반도는 중원지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사해문화: 1982년 요녕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견되었다. 사해문화는 서기전 5600년까지 소급된다. 여기서는 위계적으로 배열된 방(房)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미 사회조직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의식(儀式)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용(龍) 형상물인 석소룡(石塑龍)이 발견되었으며, 빗살무늬토기와 다양한 옥기 등도 발굴되었다. 옥기는 사회적 분업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4)부하문화: 적봉시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간 통료시(通遼市) 파림좌기(巴林左旗) 호얼토향 부하구문(富河溝門)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는 서기전 5200년까지 소급한다. 최초로 복골(卜骨)이 출토되었다. 동물의 견갑골에 구멍을 뚫고 불에 구워서 치는 점을 골복(骨卜)이라고 하고 골복을 한 뼈를 복골이라고 한다. 골복의 전통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와 일본에서도 보인다. 골복의 전통은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으로 전해져 서기후 3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중국의 중원지역에서는 상(商)나라 초기에 골복이 유행하였으나 후기로 가면서 거북의 배 껍질이나 동물의 견갑골에 갑골문을 음각하는 갑골점으로 바뀌게 된다 (주나라가 등장하면서 주역의 근원이 되는 서법(筮法)으로 바뀌었다.)
이는 상나라를 세운 정치세력의 근거지가 요하지역이었음을 뒷받침한다.
5)조보구문화: 적봉시 오한기 고가와포향(高家窩鋪鄕) 조보구촌(趙寶溝村)에서 발견되었다. 서기전 5000년까지 소급한다. 여기서 출토된 토기에 봉황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도안들이 보인다. 또 여기에서 그림이 그려진 채도(彩陶)가 최초로 발굴되었다. 이 채도는 서기전 5000년에 제작된 것으로 황하유역 앙소문화의 채도보다 빠르다. 채도는 서아시아에서 서기전 7000년경에 등장하였다. 채도는 중앙유라시아의 초원길을 통해 알타이지역으로 전해지고, 이어서 남하하여 요하유역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요하유역의 채도문화는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지는 한편 중원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앙소문화(중원지방)의 채도는 조보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6)홍산문화: 서기전 4500년까지 소급한다. 홍산은 적봉의 동북방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내몽고와 요녕성의 접경지역인 적봉, 조양(朝陽), 능원(陵源), 객좌(客左), 건평(建平) 등을 중심으로 유적지들이 분포되어 있다. 홍산문화 만기(晩期, 서기전 3500-3000년)에 해당하는 우하량(牛河梁)유적은 거대한 제단, 여신묘(女神廟), 적석총(積石塚)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에 초기국가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본다.
이 초기국가는 조선(고조선)의 발상지로서, 그리고 하나라를 멸망시킨 상(商)나라의 근거지로서 거론되고 있다. 적석총은 고구려, 백제,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계통의 묘제이다. 적석총유적은 내몽고에서부터 요하유역, 집안시와 통화현 일대, 한강유역, 일본 등에 산재해 있다.
홍산문화지역은 청동기시대로 가면 적봉 일대의
a)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서기전 2500-1500년)
b)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서기전 1500-700년)
c)조양 일대의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 등으로 이어진다.
서기전 70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의 발견과 서기전 3500년경에 요하유역에 초기고대국가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중국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중국은 서기전 4500년경의 황하유역과 서기전 5000년경의 장강유역을 중화문명의 발상지로 보고 있었다. 서기전 3500년은 3황 5제의 신화시대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황하유역의 하(夏)나라에서 시작해서 상(商)나라와 주(周)나라로 이어지는 고대국가단계를 설정하였다. 요하문화의 등장은 이러한 중국의 정설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요하문화 전 발견 전 까지, 중국은 한족(漢族) 또는 화하족(華夏族)만을 중화민족으로 취급하여 왔다. 즉, 중국의 중원지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문화의 중심지인 중원지역에서 멀어질수록 미개한 오랑캐의 땅이라고 하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보편적인 인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변방지역으로 간주했던, 요하지방에서, 황하문명이나 장강문명보다 먼저, 그리고 더 발달된 문명이 있었음이 확인되면서 이러한 중화사상에 대해,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1980년대부터 등장한 새로운 이론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統一的 多民族國家論)’이다. 다시말해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란 한마디로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과 그 역사는 고대로부터 중화민족의 일원이고 중국사라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1)요하 일대를 기존의 세계 4대문명보다 앞서는 새로운 문명권으로 부각시키려는 요하문명 론을 제시하고,
2)중화문명의 기원을 기존의 황하유역이나 장강유역이 아니라 요하유역이라는 새로운 관점 을 제시하며,
3)중화문명의 기원지인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모든 고대민족은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논리 를 제시하고 있다.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高陽氏) 전욱과 고신씨(高辛氏) 제곡이 모든 북방민족들의 시조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a)요하지역에서 일어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 모든 고대국가를 중
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b)예, 맥, 조선, 숙신, 동호, 선비, 몽골, 만주족 등 동북
지역의 모든 고대민족들은 모두 황제의 후예로 중화민족의 일부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른바 동북공정)
그러나 이러한 중국 측의 주장은,
a) 기존의 중국인의 민족, 역사관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중원지역의 한족을 중심으로 구성해온 지금까지의 역사를 부정하고 요하유역을 중국문화의 중심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b) 특히 요하유역의 민족들이 황제의 후예라는 것은 더더욱 그들의 역사관에도 맞지 않는것이다. 더군다나 황제가 실재했던 인물이라는 증거가 없는 신화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의 논리는 객관성이 없다.
그렇다면 요하문명을 일으킨 주체는 누구인가?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유전자 분석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기원과 이동을 밝히는 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현생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0만 내지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아프리카를 떠난 시기는 대략 6만 내지 7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홍해를 건너, 인도 남부지역에 머물던 집단 중 일부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만 내지 5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a) 그들은 먼저 바이칼호 근처와 레나강 유역에서 신석기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그러니까 서기전 8000년경에 신석기문화를 가지고 동아시아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b) 몽골초원에서 대흥안령 남단을 지나 만주, 요서와 요동 지역으로 이어지는 초원으로 내려왔다 (중국지역으로 가는 루트는 사막, 산맥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문화를 가진 이주세력은 선주민들을 제압하고 지배세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바로 요하문명을 일으킨 세력이다.
c)다시 이들 중 일부가 한반도를 거쳐,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들어갔다. 즉, 이들과 선주민(先住民)들의 혼혈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골을 분석한 결과로는 하가점 하층 및 상층에서 발견된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는 고동북(古東北) 퉁구스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몽골인과 같다는 의미이다.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 내몽고 중남부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古華北) 지나유형 과는 다른 인종이다. 요하문명의 내용 또한 중원문명과 상당히 다르다.
요하문명은 a)거석문화, b)채도문화, c)빗살무늬(즐문)토기, d)세석기문화가 특징이다. 반면에 중국의 문화권은 채도외에 별다른 공통점을 요하문명과 찾을 수 없다.
즉, 이 요하문명과 중국은 서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상호 교류해온 것으로 보인다. 요하문명은 만주와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의 문명은 요하문명의 영향하에 형성되고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명의 이동패턴은 청동기시대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요하문명을 만든 주체와 황하문명을 만든 주체는 서로 다른 인종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만주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우리 민족의 원류의 상당부분은 바로 요하문명에기인한 세력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