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과 평양의 위치와 거리를 설명한 가장 대표적인 기록인 통전의 기록을 보면 지금의 평양과 압록강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압록강이 평양 서북쪽 450리에 있다는 것을 거리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지금의 북한 평양과 압록강의 위치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문에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며 당나라가 건넌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논리를 뒷받침 하고 나아가 아래로는 ‘요ㆍ고려 경계 현 압록강’, 위로는 ‘위만조선과 낙랑군의 치소는 지금의 평양’이라는 주장을 역시 뒷받침 하여서
1)위만조선 왕검성 = 낙랑군 치소 = 고구려 평양 = 현 평양
2) 수당 시대 고구려 압록강 = 고려 압록강 = 현 압록강
이라는 이른 바 학계 통설의 큰 줄기가 성립합니다
그런데 통전의 기록부터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가탐도리기를 과정적으로 검토하여 가탐(730~805, 공직에 나아간 해 751)이 도리기에서 가탐 당시의 안동도호부의 위치가 요동성 (한 양평성)이 아니었음에도, 아울러 당시 영주가 현 조양이 될 수 없었음에도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위치를 조작하였던 바를 고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가 빈번하므로 통전의 기록을 타 사서 기록과 견주어 면밀히 되살필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독사방여기요는 명말청초인 17세기 초에 한족 학자가 완성한 명나라 지리총서로 해당 지리서의 산동8에서 남소성을 현 진저우만(대련 서북쪽) 근처로 증언하고서도 산동9에서 조선을 설명하며 남소성이 조선 함경도에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억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사서 기록을 분석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사서 기자의 견해를 배제하고 상기사서와 하기사서 간의 교차분석을 통해 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또한 명사와 독사방여기요 등 명나라 이후의 특히 한족이 작성한 사서문헌에서는 요동과 만주의 지리를 한반도에 구겨 넣는 행태를 보이므로 더 엄밀함이 요구가 됩니다
독사방여기요의 경우 산동9는 일단 배제하고 면밀하게 다루어야 하며 요동지역의 지리정보를 담고 있는 산동8을 중심으로 지리를 풀어가야 합니다
鴨淥水闊三百步,在平壤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
<통전>
ㆍ압록강 ~ 평양 450리
ㆍ압록강 ~ 요수 480리
이 기록을 토대로 하면 요수에서 평양까지는 약 930리가 됩니다
현 위치에 대입하면 얼추 근사해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과 비교해 보며 어떨까요?
遼東舊都司城。東至鴨綠江五百六十里,南至旅順海口七百三十里,西至山海關一千一十五里,西北至大寧廢衛八百六十里,東北至故建州衛七百九十里。
遼陽城即司治。
襄平城司北七十里。
遼水司西百六十里,又西距廣寧衛二百里。
<독사방여기요 산동8>
1) 압록강(17세기 압록강, 즉 현 압록강) : 요양 동쪽 560리
2) 요수 : 요양 서쪽 160리
통전과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교차해 보겠습니다
1) 요수 ~ 압록강 480리 <통전>
2) 요수 ~ 압록강 720리 <독사 산8, 산9>
불일치합니다
이상하죠? 방위와 거리의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너무 크게 차이가 납니다
독사방여기요의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입니다
같은 압록강이라 볼 수 있습니까?
즉 통전의 압록강과 현재의 압록강은 다른 강이라고 봐야 타당합니다
또 다른 기록을 보겠습니다
玄菟郡西蓋馬縣,有馬訾水,西南至遼東郡西安平縣入海,過郡二,行一千一百里。郡二:玄菟、遼東也。<한서 지리지>
1) 현도군 서쪽 개마현에 마자수가 있다
2) 서남쪽으로 요동군 서안평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3) 현도군과 요동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
馬訾水出靺鞨長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신당서>
4) 마자수는 말갈 장백산에서 발원한다
5) 물빛이 오리의 머리빛 같아서 압록수라 한다
학계 통설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 북안으로 비정하였습니다
저는 앞서서 서안평이 그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고찰한 바 있습니다
서안평은 어디일까요?
海州衛司西南百二十里。
沙卑城即(海州)衛城。亦曰卑沙城。
遼河在(海州)衛西南五十五里。
蓋州衛司西南二百四十里南至復州衛百八十里,西北至廣寧衛三百六十里,東至鴨淥江五百五十里。
蓋牟城即衛治。
西安平城亦在衛東南。漢縣,屬遼東郡。
<독사방여기요 산동8>
1) 비사성은 요양 서남쪽 120리
2) 요하는 비사성 서남 55리
3) 개모성은 요양 서남쪽 240리
4) 무려성(광녕위)은 개모성 서북쪽 360리
5) 압록강(17세기, 즉 현 압록강)은 개모성 동쪽 550리
6) 서안평성이 개모성 동남쪽에 있는데(서안평은 개주위 소속) 한나라 요동군 소속 현이다
廣寧衛司西四百二十里。
無慮城今衛治。本漢之無慮縣,屬遼東郡。
閭州城在衛東北。遼置。《志》云:以近巫閭山而名。在遼州西百三十里,西北至上京臨潢府九百五十里,金廢。
豪州城,在衛東北二百二十里。《遼志》:漢遼東西安平地也,遼置州,西北至臨潢七百二十里,金廢。
<독사방여기요 산동8>
7) 무려성(광녕위 치소)은 요양 서쪽 420리
8) 무려성은 한나라 요동군 무려현
9) 여주성은 무려성 동북쪽
10) 여주성의 이름은 근처에 의무려산이 있어서 붙은 것
11) 여주성은 요주(한 양평성, 고구려 요동성이 있던 지역) 서쪽 130리
12) 호주성은 무려성 동북 220리
13) 호주성은 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이라 한다
서안평의 위치가 두 곳(요양 남쪽, 금주 동북쪽)으로 나타나는데 어찌 되었든 현 학계 통설인 현 압록강 하구 북안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은 분명합니다
왜 이렇게 요하를 사이에 두고 서안평의 위치가 두 곳으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1) 태조대왕 94 년 (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2) 동천왕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3) 미천왕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즉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서안평은 고구려의 다물 활동으로 인하여 개주위(요하 동쪽) 지역에서 광녕위(요하 서쪽) 지역으로 교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
기록 교차 분석을 정리하겠습니다
1) 압록강은 현도군에서 발원하여 현도, 요동 2개 군을 지나 요동군 서안평현에서 바다로 드러간다(신당서, 한서 지리지)
2) 현 압록강과 고구려 시대 압록강은 다른 강이다(독사방여기요, 통전)
3)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서안평은 요하 동쪽, 요양 서남쪽에 있었으며 후에 요하 서쪽으로 교치된 것으로 보인다(독사 산8, 요사 지리지, 한서 지리지, 신당서, 삼국사기)
저는 고대의 압록강이 고구려 수도 근처에서 천참(천혜의 해자) 역할을 하는 강을 이르는 명칭이었다고 보며
상기 고찰을 토대로 할 때에 당시의 압록강은 요동에서 찾아야 하며
고구려 수도의 변천에 따라서 움직였을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