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죽인다는 말은 한 적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군인이 타 국가 영토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일반 백성이 자기 영토에 들어왔다고 해서 죽이진 않았겠죠. 다만 삼국의 백성들 모두 자유롭게 이 나라 저 나라 영토 아무 문제 없이 드나들면서 원하는 나라에 정착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일단 감방친구님 말씀대로 수상한 사람이 아닌 이상 농사지으면서 살게 했을 것 같네요.
예,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읽은 기억으로는 몇 명 단위까지 관청에 보고가 되거나 조사를 했더군요
고려사를 예로 들면 어느 지역에 여진족이 들어와 돌아댕기는데 왜 들어왔는지 조사를 했고 식량이 필요하다 하면 식량을 줘서 돌려보냈고 고려에서 살려고 왔다 하면 살게 했더라구요 나중에는 요와 고려 사이에서 단물만 빼 먹으며 왔다리갔다리 하는 여진족이 많아서 받아주지 말라는 얘기도 나오고 또 이주해서 살려고 온 여진족을 그곳 관리가 죽여서 문제가 되기도 했구요
선으로 그어지는 국경이란 개념은 서양개념입니다. 동양은 선이 아닌 면의 개념으로 국경 즉, 변경이나 변계를 설정했습니다. 측량기술이 없었던 시절에 국경선을 긋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진시황처럼 장성을 쌓고 국경을 만든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지요. 대충 산등선이나 하천을 기준으로 국경을 설정하는 것이고, 평야에서는 그냥 공유합니다. 우리나라 함경도와 북만주의 변계지역도 그렇고...현재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도 공유되는 변경이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국경개념이 없을 때 선긋고 우리 땅, 우리 바다라고 선언하기 시작한게 왜나 대만으로 쫒겨가기 전 자유중국이라는 얘들이었지요.
저는 이건 고구려라고 봐야한다 생각합니다. 옛날에 어떤분이 말갈이 일개 도적처럼 표현한것처럼 느껴질만큼 사서에 등장하는 말갈은 전부 고구려라고 하더라구요. 고구려에 말갈부족들이 부족으로서 소속되어 있었으니까요 아니면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병사를 이용해 싸웠다는 기록은 아주 많이 등장하지않습니까 고구려가 망한후 발해가 건국되기전까진 고구려를 말갈이라 부릅니다. 고구려라는 기록은 없고 말갈이란 기록이 나옵니다. 백제멸망후 그땅을 신라와 말갈이 나눠가졌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이역시 고구려가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또 고구려가 유리왕 때에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는데 이 시기 전에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ㅡ 고구려 건국(삼국사기 기준) 30 여 년 전인 bc75년에 기존 현도군이 3개 현만 가지고 요동군으로 교치가 됩니다
ㅡ 그리고 유리가 고구려에오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졸본을 떠납니다
저는 졸본을 지금의 환인이 아니라 의무려산ㅡ부신ㅡ철령 이 근방으로 가정을 하고 있는데
소서노 무리가 기존의 낙랑, 현도가 서쪽으로 밀려가는 상황에서 지금의 금주에서 요동반도 남부로 이동해 그곳에 처음 정착하여 그 후에 서북한 등지의 한반도로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북쪽에 말갈, 북동쪽에 낙랑이 있고 또 고구려와의 사이에 패수와 대수가 있었습니다(패수와 대수는 백제의 영역으로서 백제의 동북쪽에 있었습니다)
또 북쪽에 마수성이 있었습니다
마수성은 마수산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 마수는 말머리로 말갈과 음가의 유사성 또한 엿 보입니다
또 패수는 한나라 패수현이 있고, 또 요동에 요나라 때까지 패수가 있었습니다
또 고구려가 2 세기에 서쪽의 양맥을 정벌하여 복속한 기록이 있으니 이 양맥을 말갈로 본다면 사실이 부합한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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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본기 온조왕
2년(기원전 17) 봄 정월,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고,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8년(기원전 11) 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니 임금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병이 군량미가 떨어져 돌아가므로, 임금이 날쌘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고구려 대무신왕
2년(서기 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백제 온조왕
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백제 본기 건국설화 부분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이곳으로 도망해 왔을 때, 어머니는 집안의 전 재산을 내놓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공이 많았다. 대왕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유류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답답하게 지내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必將遷都가 아니라 必將遷國이라고 돼 있다
도읍을 옮겨야 한다가 아니라 나라를 옮겨야 한다고 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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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본기 온조왕
13년(기원전 6) 봄 2월, 서울에서 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였다.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61세로 돌아가셨다.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시하여 한강의 남쪽을 살펴보았는데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에 도읍을 옮겨 오랫동안 편안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길 것을 알렸다. 드디어 경계를 그어 국경을 정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패하,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 성과 궁궐을 쌓았다.
감방친구님...
조조가 유성의 오환을 207 년에 정벌하는데 요동이 200 년 가까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거든요
===> 이건가요 ? 무경십서
“이 길은 여름과 가을 모두 물을 담으니 얕다 해도 거마가 지날 수 없고 깊다 해도 배를 띄울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어려움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과거 북평군의 치소가 평강(平岡)에 있었는데 길이 노룡(盧龍)을 지나 요서의 유성(柳城)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광무제의 건무(建武) 연간 이래 도로가 파괴되어 통행이 끊긴 지 이미 200년 가까이 되어 오직 작은 길로 통행이 가능할 뿐입니다. 적들은 지금 우리 대군이 응당 무종현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전진할 길이 없어 철군할 것으로 알고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은밀히 노룡의 입구에서 백단(白檀)의 험한 길을 따라가면 적들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오히려 가깝기도 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여 기습공격을 가하면 답돈은 가히 싸우지 않고도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