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후로(한무제 즉위 이래 재정과 경제가 풍족해지고 사치풍조가 일어난 후)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 등이 동구(東甌,※)를 [1] 초래(招來,초무;끌어들임)하고 양월(兩越,남월과 동월)에서 일을 벌이니 [2] 강회(江淮,장강과 회수) 사이가 소란해지고 크게 비용이 소모되었다. 당몽(唐蒙),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서남이(西南夷)에 이르는 도로를 열어 천여 리에 걸쳐 산을 뚫고 길을 통하게 하니 파촉(巴蜀) 땅을 개척했으나 파촉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팽오(彭吳)는 [3] 조선(朝鮮)을 멸하고자 하여 [4]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해졌다. 그러다 왕회(王恢)가 마읍(馬邑)에서의 모책을 꾸미자 흉노가 화친을 끊고 북변을 침요(侵擾)하여 전쟁이 연이어 풀리지 않으니, 천하가 그 노역에 괴로움을 당했으나 간과(干戈,전란)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창해군(蒼海郡) 폐지 한(漢) 무제(武帝)는 팽오(彭吳) 등에게 요동군(遼東郡)에서 창해군(蒼海郡)에 이르는 교통로를 닦게 하였지만 인력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모되어 공손홍(公孫弘, BC 200 ~ BC 121) 등의 건의를 받아교통로 개척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BC 126년에 창해군(蒼海郡)도 폐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해군 [滄(蒼)海郡] (두산백과)
상곡군(上谷郡) 포기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 지역을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성(朔方城)을 쌓고 옛날 진(秦)나라 때 몽염(蒙恬)이 만들었던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황하를 따라 견고하게 방어선을 쳤다. 한나라 역시상곡군의 구불구불하고 외진 조양(造陽) 일대의 땅을 포기하여 흉노에게 넘겨주었다. 이 해가 한 무제(漢 武帝)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이었다. [출처] 110-9/15[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9/15)
수구리님 열심히 하시는건 알겠는데 이런식으로는 님의 주장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키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이곳 유저들이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바탕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계셔서, 님 글은 중간 부터 읽으면 뭔 소린지 이해도 안되고 결국 처음부터 님이 복붙 한 방대한 양을 다 읽어야하는데 -마치 기존의 역사관은 전부 지워버리고 아예 새로운 역사관을 주입하는것처럼- 그럴 사람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러니까 님의 주장을 이곳의 주류로 관철시키는 것은 확률상 제로에 가까워요. 논의를 통해 실마리를 찾고 싶다면 타협이 필요합니다만, 님은 너무 완고하셔서 그럴 여지도 없는것 같구요. 지금까지의 이런 활동을 앞으로도 계속 하신다면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것 입니다. 그냥 게시판 지분만 차지하시는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