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진서』와 『후한서後漢書』에서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신라도 전부 중국인들이 지배했다고 왜곡하고 있지만, 조선 중종때 실록편찬 찬수관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에서는 이 신라의 전신을 진한辰韓으로 정의하고 있다.
신라의 근원과 뿌리에 대한 역사 왜곡에서 또 하나의 문제는 신라의 건국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가 중국 황실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삼국유사』, 『삼국사기』에서 함께 왜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어머니는 선도산仙桃山 성모로 불리는 북부여의 5세 고두막高豆莫 단군의 따님 파소婆蘇이다.
또한 『삼국사기』는 신라를 정통으로 놓기 위해서 고구려를 폄하하고, 고구려의 시조에 대한 천륜을 파괴했다.
그러나 『북부여기』와 고려 말 수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역임한 행촌 이암(李嵒, 1296-1364)의 『단군세기』에서 말하는 삼국 건국의 결론은 신라 혈통의 근원이 북부여와 직접 연관이 있고, 고구려도 북부여 마지막 단군을 계승한 정통 왕조이며, 백제는 고주몽의 아들이 세웠으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한 계통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크게 보면 가야伽倻까지도 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한 형제이고, 직계로 보면 바로 북부여를 뿌리로 한 형제인 것이다.
우리가 신라 왕가 전체 역사를 보면, 김씨 왕조 38명이 나오는데, 그 시조는 북방 유목문화와 관련이 있다. 한무제에게 생포됐다가 한무제의 목숨을 구했던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왕자 김일제金日磾의 동생이 김륜金倫이고, 그 5세손 중에 형인 김알지金閼智가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이고, 그 동생 김수로金首露가 가야의 시조이다.
이 북방 유목문화는 어디서 나왔는가?
행촌 이암(李嵒, 1296-1364)의 『단군세기』 기록에 의하면 3세 가륵嘉勒 단군이 열양列陽 욕살褥薩인 색정索靖을 귀양을 보냈다가 사면을 해서 흉노 시조, 왕으로 임명했고,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 때는 그 동생을 몽골의 초대 왕으로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세 단군 때는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켜서 단군께서 지백특支伯特을 평정했는데, 강거는 돌궐의 시조이다. 대세를 보면 이 동서 유목문화의 큰 세력권은 바로 환국·배달·조선을 계승한 동방 우주광명 문화, 삼신사상을 가지고 있다.
신라는 전통문화인 신교(神敎)를 모체로 해서 유교도, 불교도 받아들이고, 도교와 함께 융합을 해서 신라 천년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화랑 문화를 보면, 화랑은 각자가 ‘화랑은 미륵의 화신이다'라는 미륵의 심법으로 미륵의 이상낙원을 건설하는 주인공이었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내려 준 세속오계는 환국·배달·조선에서부터 내려온 그 소도 제천의 성지에서 우주광명의 인간 심법을 전수하는, 경당扃堂에서 가르친 오상지도五常之道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왜곡된 한국사 역사의 축소판이 신라 건국의 첫 소식에 함축되어 있다.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침공해서 양만춘楊萬春 장군에게 눈알이 빠지고 그 여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한나라 무제와 더불어 그들이 가장 위대한 제왕이라고 하는 당태종이 고구려침략을 감행하다 그렇게 무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양서梁書』 같은 여러 책을 냈는데,
『진서』와 『후한서後漢書』에 보면, 진한辰韓은 어떤 나라인가?
『진서晉書』를 보면 “자언自言호대 진지망인秦之亡人이 피역입한避役入韓하니라” 중국 진시황秦始皇 때 만리장성 노역을 피해서 이 동방으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진한이 동방 진辰 자가 아니고 진나라 진秦 자 ‘진한秦韓’이다'라고 왜곡했고,
『후한서』에도 “진한기로자언辰韓耆老自言호대 진지망인秦之亡人이 피고역避苦役하야 적한국適韓國하니라”라고 하여 ‘진한의 노인들이, 우리는 노역을 피해서 도망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내용을 슬쩍 끼워 넣었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보다도 그 근원에서 볼 때는 더 잘못되고 악질적이다.
그러니까 한반도에 있는 신라도 전부 중국 사람들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볼 때 한반도는 다 중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보면 “선시先是 조선유민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위육촌爲六村... 시위진한육부是爲辰韓六部”라 해서 ‘이보다 먼저 고조선의 유민들이, 단군조선이 망해서 내려온 백성들이 산과 계곡에 흩어져서 살았는데 이들이 바로 진한 辰韓 6촌부다’라고 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은 진한辰韓이다. 신라의 6부, 6촌의 지배 세력은 본래 고조선의 유민이다. 단군조선 역사가 망하면서 북방에서 내려온 것이다. “선시先是 조선유민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이 구절에서, ‘선시先是’, 신라의 진한辰韓이 생기기 이전은 언제인가?
『북부여기』와 『태백일사』를 보면, 서력 전 238년에 단군조선 마지막 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단군 자리를 내놓고 은둔하셨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만주 영역인 진한(진조선)이 그때 망해 버리고 6년 공화정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진한이 망한 것을 기준으로 약 180년 전부터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바로 신라 땅 경주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신라 땅, 경주 이 지역도 본래 단군조선의 막조선영역이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선생은 신라의 진한, 가야의 변한, 그리고 백제의 전신 마한 즉 남삼한은 만주대륙 북쪽 삼한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신라의 첫 이름인 진한은 북쪽 단군조선의 삼한에서 진한 사람들이 내려와서 형성된 것이다. 조선 중종때 실록편찬 찬수관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에서도 이 신라의 전신을 진한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동방 진辰 자의 실체가 아주 정확하게 중국 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나온다.
지금 역사 교과서에서는 준왕準王이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 수도는 대동강 평양이라 한다. 한반도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왕검성王儉城은,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碣石山 근교에 있는 낙랑군樂浪郡 창려현昌黎縣에 있었다.
당시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단군조선의 삼조선(진조선,번조선,막조선)가운데 번조선의 준왕準王이 있던 왕검성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하기 위해서 한나라 무제武帝도 왕검성으로 처들어왔다고 한다. 그러고서 한반도에다가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을 비롯해서 네 개 군, 한사군漢四郡을 위아래 쪽으로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 진실을 알 수 있는 「위지동이전」의 내용은, “초初, 우거미파시右渠未破時, 조선상역계경이간우거불용朝鮮相曆谿卿以諫右渠不用, 동지진국東之辰國”이다. 처음에 우거왕 때, 정승 역계경이 정책을 건의해도 안 받아주니까, 망명을 했는데, ‘동지진국東之辰國’, 동쪽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했다. 동방에 진국이 있었던 것이다. 이 진국이라는 것은 원래 동방의 천자 나라, 진한(진조선)이다.
단군조선의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三朝鮮) 중, 북쪽 만주에 있었던 진조선(辰朝鮮)이 서력 전 238년에 먼저 멸망 후 그자리에 북부여가 239년에 들어섰고, 44년 뒤인 서기 전 194년에 왼쪽 날개인 번조선의 마지막 75세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패망 당했다. 그래서 기준이 발해로 해서 황해 바다를 건너 군산群山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런 역사 인식이 전혀 없이 지금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이 진국辰國 문제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
진국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조선사대관』(1948)에 ‘남방의 진국’이라 써놓았다.
‘우거는 한나라 유망인流亡人(난민)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고 남방의 진국이 한漢에 교통(왕래)하려 함을 방해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본받아서 지금 강단사학에서 신라, 가야, 백제가 생기기 전에 거기에 여러 작은 성읍국가들이 있었는데 그때 중심 세력이 진辰이라는 것이다.
초등고교과서를 보면 남쪽에 진이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로 성장했고, 그것이 삼한三韓이라고 왜곡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면 윤내현 교수는 논문에서 이 진국을 어떻게 말하는가?
“갈석산碣石山에서 조선(위만조선)을 지나 대인의 나라를 통과하면 동쪽의 해 뜨는 곳에 이른다.”는 말이 『회남자淮南子』 「시칙훈時則訓」에 나온다. 이것은 갈석산에서 ‘조선’ 즉 위만조선을 지나 ‘대인의 나라’를 통과하면 동쪽의 해 뜨는 나라에 이른다는 것이다. ‘대인의 나라’가 무엇인가? 이게 진국이라는 것이다. 진국은 중국 사서에도 동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패망당한 뒤에 대중상大仲象이 후고구려를 세웠다가 뒤에 그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대진(大震, 발해)이라고 했다. 단군조선을 전체로 부를 때는 진국辰國이고, 그것을 나눠서 부를 때는 만주가 진한辰韓이고, 그다음에 왼쪽 요서, 산둥까지가 번한番韓이고, 한반도 전체는 마한馬韓이다. 나중에 22세 색불루索弗婁 단군 때 삼한이 삼조선三朝鮮 체제로 바뀐다.
조선 중종때 역사를 편찬하는 찬수관을 지낸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주 명백하게 전하고 있다. “총지總之하야 명왈단군관경名曰檀君管境이니 시즉진국是則辰國이오, 사칭단군조선史稱檀君朝鮮이 시야是也라”, 이를 총칭하여 ‘단군관경’이라 하니 이것이 곧 진국辰國이라 했다. 단군이 이 전체 영역을 다스렸고 이것이 진국(辰國)이라 했다.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