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생각에는 고구려한테 패한 이후로는 신라보다 약소국이었습니다.(근거 1. 백제가 공주지역에서 왕권이 안정치 못해 왕이 암살<문주왕은 확실-삼근왕도 비슷한 유형으로 추정>되고, 귀족들이 권력이 강화되었다.
근거2. 신라세력이 경상도의 상당수를 차지한 상황이었는데, 백제의 위세가 떨치던 지역은 점차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이는 전라남도 남원과 그 남부지역에서 대가야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음
근거3. 백제가 나름 세력을 구축한 무왕시기조차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고, 오히려 패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만, 동성왕시기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는 백제가 신라보다 강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자 「에조의 나라는 어느 쪽에 있는가?」
견당사 「동북에 있다」
천자 「에조는 몇종 있는가?」
견당사 「삼종 있다.먼 곳을 都加留, 다음을 麁蝦夷라고 하여, 가까운 것을 熟蝦夷라고 한다.이번 따라 온 것은 熟蝦夷이고, 매년 본조에 입공 하러 온다」
천자 「에조의 나라에는 오곡이 있는가?」
견당사 「오곡은 없다.고기를 먹으며 생활하고 있다」
천자 「에조의 나라에는 건물이 있을까」
견당사 「없다.심산 안에서 수목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일본의 국력과 쌀생산량은 메이지시대 이전까지 한반도 위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뭐 여몽전쟁 때면 모를까요;
아래는 제가 예전에 쓴 댓글입니다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18~19세기면 한반도는 조선후기이고 일본은 에도막부시대인데
당시 조선의 쌀생산량을 측정하기 앞서 탈세전(혹은 은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세의 부과대상에서 부정,불법으로 누락시킨 토지를 말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 탈세전이 조선후기에 가면 성행하게 되어 정확한 쌀생산량을 알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세종대왕시기의 쌀생산량을 회복하였거나 혹은 기술의 발달로 더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석단위와 조선의 석단위가 다릅니다. 그러나 대충 계산해본 결과 일본식 석 기준으로
세종대왕 시기 때 대략 2000만석~2500만석을 생산했던 것으로 계산되고
당시 일본은 학자들마다 농지와 인구에 관해 편차가 커 정확히 말할수는 없으나 1700년 기준으로 대략 3000만석 약간 안되게 생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北島正元의 논문을 보면
して日本の水田と畑の割合は 6:4 位を維持しています. 1874年以前の日本の農地と人口に対しては研究機関と学者たちごとに偏差が大きくて論難が多いですが 1700年を基準でよく見ましょう.
1700年の農地面積は 282万ha 60%が田だと言ったら水田の面積は 169.2万ha 人口は 28,287,200人, 人口 1人当り農地面積は 0.598反, 江戸時代単位面積当たり米生産量 190kg/反を考慮すれば 0.758石/反
1700年 0.758石/反の米上がり高以後日本でどんな仕事が発生しましょうか? 次のグラフを見ましょう.
당시 일본의 1인당 쌀생산량에 세금을 공제하면
에도시대 일본의 백성들은 1년에 1인당 0.228석으로 삶을 연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신은 1년에 1인당 1석..(조선인들이 중국과일본인에 비해 밥을 세배정도 더 먹은 것도 고려 해야할 듯
당시 조선은 일본과 쌀생산량은 얼추 비슷한데 일본보다 인구가 2분의 1가량 적고 다이묘들간의 전쟁이나 수탈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비추어 보았을 때
에도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은 조선에 비하여 형편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님도 에도시대 역사를 공부했다면 알겠지만 1720년부터 1840년까지 일본에서는 비참한 기근이 연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이것도 고려해야 돼요
日本歴史にいて惨めな飢饉が 1720年から発生し始めます.
日本学者たちは気象條件が良くなかった. と日本愚民の心をなぐさめるが
「郷村の百姓どもをば死なぬ様に生きぬ様に合点いたして収納」(東照宮上意)の結果,単位面積当たり米生産量が 0.758石/反(税金を控除すれば 0.38石/反 ) 以下に減ると 1840年まで飢饉が連続的に発生するようになる.
1880年 480万トン 明治13 1880年 人口 36,649,000 人 131 kg/1人 0.873石/1人
또한 얼마전 도쿄에서 에도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1만여구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평균 키는 남성이 150센치대 반으로 여성은 그것보다 10cm가량 작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는 고대 일본의 조몬인들보다도 키가 작은 것입니다.
또한 발굴된 1만여구의 인골이 전부 만성적 영양실조로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상당수가 일본도에 의해서 살해당하거나 매독으로 사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신매매도 성행했습니다
에도시대의 장녀 이외의 여성은 가족의 빈궁한 삶에 의해서 살해되거나 인신매매로 전국 각지의 유곽에 매춘부로 팔려 나갔습니다.
江戸時代の女性は家族の貧しい生によって殺害されるとか人身売買で全国各地の遊郭に売春婦に売れて行きました.
즉 결론은 에도시대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시대라는 겁니다 백성들의 삶은 정말로 참혹했습니다.
Ps 잡설로 당시 -이불-같은 것들도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시야 등장함.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불없이 멍석이나 돗자리에서 잠들음
그 집이라는 것도 비좁은 공간에서 여러명이 생활하는 연립주택이 대부분
백제계가 고구려계 신라계 가야계 모두 일본의 귀족이였고
그중에서 백제계가 백제가 망했는데도 가장 세력이 셌죠
백제계가 왕족이였으니까요. 그리고 백제왕족이 헤이안 시대를 열어
당과의 1:1 외교를 처음으로 하게 되죠 고국인 백제가 망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죠. 님말이 맞음 저도 이렇게 배웠거든요
하지만 신라가 3국을 통일한 다음에는 신라의 황금기를 구가 하게 되는데
국력이나 경제적으로 일본에 뒤졌다는건 말도 많이 어긋나요. 왜국이 우리민족국가의
경제력을 그나마 턱밑까지 올라오고 또 넘어서기 시작한 시점이 임진왜란 후에요
그 전까지는 왜국에 입장에서는 한국은 대국이였죠
의자왕은 곧 무당을 불러 그 글귀의 뜻을 해석하도록 했다. 그러자 그 무당은 머리를 조아리며 “달이 둥글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이니, 이제 곧 기울 때가 되었다는 뜻이고, 초승달은 아직 차지 않았으니 머지 않아 보름달이 된다는 뜻입니다.”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결국 백제는 망하고 신라는 흥한다?’이런 생각을 한 의자왕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글세요. 백제는 아신왕 이후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동성왕, 무령왕 시기 다시 회복하나 싶더니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는.. 멸망할 때까지 영영 되찾아오지 못했죠. 이것이 국력의 차이가 아닐까요.
암군으로 불리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시기에도..
백제의 무왕은 기록된 것만으로도 모산성, 독산성 등의 성들을 침공하고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가 벌어졌으나..
한강유역을 되찾아오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백제 백성들이였어요.
이 시기에 일본열도의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백제에서 백성들이 전쟁을 피해 고구려나 신라, 일본열도로 대량 이주했기 때문이에요. 인구가 외부로 대량 유출되던 시기입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 백성들이 대규모나 소규모로 일본열도로 이주한 기록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대규모 이주 기록 중에는 아신왕시기에 ..
백제 궁월군이 120현민을 데리고 일본열도로 이주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1현의 천명이라고 잡으면 12만명에 이르는 규모에요;
신라는 진흥왕이전까지 한강유역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중국과의 교류도 그때서야 제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중국입장에서 신라는 듣보일 수 밖에요.
백제 본토는 아신왕이후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졌다..
동성왕, 무령왕시기 다시 회복하나 싶더니
신라한테 뒷통수 맞고는 그저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만을 차지한 조그마한 국가로 전락해버렸지요.
인구는 이미 외부로 대거 유출된 상황이고..
그래서 광개토대왕비문을 보면 백제를
'남을 잔'자 써서 백잔이라고 칭합니다.
인구가 외부로 대거(특히 일본열도) 이주되고 남은 나머지 라는 뜻이지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403년 12개 현, 409년엔 17개 현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적혀져있고요..
광개토왕비문을 보면
백제 백성들은 전역에 시달려 신라로 많이 도망하여 호구가 줄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속일본기를 보면 이러한 상황에대하여
"백제도래인의 씨족이 너무 많아 다른 씨족은 열에 한두명도 안된다"
라 하기도 하지요.
특히 오우진 천황 때부터 백제풍이 유행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오진천황 다음 천황인.. 태양의 자손이라는 "호무다"가 바로 백제왕자인 "인덕왕"이며
피라미드보다 크다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의 주인입니다.
이 시기가 광개토왕의 백제정벌 직후의 때입니다.
또 님 120현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모르나요?
또한 삼국사기를 살펴보았는데
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진덕여왕이 소국이 대국을 어떻게 치냐..라는 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기록에서 신라가 당나라에게 백제의 국력을 강성하다 라고 한 것은 당나라의 도움을 얻기 위한 문학적 수사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서신에서 내용이 문학적 수사라고만 보기에는 상황이 그다지 신라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신라가 당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구요.
그리고 전역에 시달려 호구가 신라로 빠졌다는 기록은 호태왕비가 아닌 삼국사기에서의 기록입니다. 아마 착오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백제가 전쟁하면서 인구가 신라나 왜로 유출된 것을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신라가 백제보다 우위로 만들만큼 의미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예전엔 오진부터 실존했다고 봤지만, 요즘은 게이타이 오키미 이전의 왜왕들도 실존 여부가 의심받는 마당이고, 전반적인 내용들도 고고학이나 삼국사기외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해서 어색한 부분도 많은 것을 보면, 유출된 현이 과장되거나 사실 그대로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왕인 박사 내용만 보더라도 천자문이 등장하는데, 중원측 기록에서는 천자문이 양나라때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후대의 내용을 끌어올리거나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일본기는 백제인들의 대량 거주가 이루어진 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기록입니다. 7세기 이후는 고고학적으로 보나, 기록으로 보나 확실하게 대량 이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씨는 귀족들의 것이고, 백제의 영향을 농후하게 받은 왜의 귀족들은 상당수 백제인인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5세기에 백제가 잔당으로 불릴 만큼의 인구 유출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별개이지요.
일단 5세기 경 왜에 백제의 하사품으로 추측되는 유물들이 발견되거나 백제의 영향과 흔적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가야계나 신라계 등 다른 도래인의 흔적도 짙고, 당시 의미있을 정도의 대거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백제왕계가 왜왕계라는 것은 가설입니다. 백제왕계가 왜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으리라 보지만, 왜왕계 자체가 백제왕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덜덜덜님도 신라를 이상하게 낮춰 보시는데, 신라도 5만 군을 동원할 정도로 어느정도 역량이 있었고, 그러한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멸할 수 있었던 겁니다만.
당나라기록을 보면 백제멸망당시 인구가 76만호로 고구려 멸망당시 인구인 69만호보다 더 많습니다. 그당시는 인구가 곧 국력이던 시절이죠. 그만큼 영토크기는 작아도 경작지가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동성왕이후로 백제가 신라에게 전투에서 열세를 보인적이 많은 이유는 신라측에서 기록을 왜곡하거나(특히 선덕 진덕 두 여왕시기. 김유신이 불패명장이라면 왜 신라는 백제에 멸망직전까지 몰렸나?) 백제의 지방분권형 봉건제(담로제도)가 대규모 군사동원에 불리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무왕과 의자왕때에는 전략을 바꿔 지방영주들에게 각자 군사를 가지고 신라 전역을 각개격파해 들어가게하고 뺏은땅을 영주들이 직접 전리품으로 가지게하는 전략을 썻죠. 그러자 국력 인구에서 우위인 백제의 위력이 나오기 시작해 신라가 위기에 몰린거죠. 하지만 의자왕말기 연전연승에 도취된 의자왕이 영주들의 책봉을 뺏어버리고 그 봉토를 직접 지배하려고하자(대신 자기의 아들들을 그 자리에 임명) 이에 대한 대규모 반발이 일어남으로써 백제멸망시에는 의직 계백등이 지휘하는 중앙군 3~4만외에는 동원가능한 군사가 전무하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