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서 유목경제를 영위하고 살았던 흉노와 선비족 등과는 달리
고구려와 부여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한 목축과 수렵이 성행한 정주민들이었습니다.
고구려는 환도성과 국내성시절 그 척박한 산지 협곡 환경에서도
밭을 일구고 조금이라도 더 산출을 얻기위해 고군분투했을 정도로
농경을 매우 중시했던 나라였죠.
그러나 농경만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유지할수 없었기에
생존을 위한 수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것은 곧 기마와 보병의 조합을 통한
군사훈련이 되어 곧 군사력의 증강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부족한 식량해결을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한
주변종족과 국가에 대한 침략을 활발히 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유목민족의 경우, 주로 겨울에 식량부족 문제때문에
중국을 노략질하는 등 침략적 성향을 띄었지만,
사실 유목민족은 풍부한 육류와 유제품 덕분에 사냥보다는 가축을 돌보는것이
그들 삶의 주를 이룹니다.
반면, 고구려는 비록 중국처럼 농경을 기반으로 했지만 빈약한 소출로 인해
수렵에 몰두했고 그날 그날 사냥을 하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들이 굶어야 하는 절박한
몸부림으로 수렵에 매진합니다.
심지어 사냥을 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말이 부족할 경우
고구려인들은 거란이나 선비족으로부터 물물거래를 통한 수입도 했지만
약탈을 통해 말과 사람을 빼앗아 오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양과 소 말이 풍부했던 유목민족들이 수렵민족보다 경제적 환경이 윤택했다는 것이죠.
이는 곧 생존을 위해 부족집단이 역할을 나누어
한쪽은 말을 달리며 정확히 화살을 날리고 또 다른쪽은 창을 들고 죽어라 달리며
사냥감 몰이를 해야 그날 그날 끼니를 떼울수 있던 수렵민족의 전투력이
유목민족의 그것을 능가할 수밖에 없었다는게 서영교 교수님의 견해입니다.
이는 비단 고구려뿐만 아니라 완옌부 아골타의 여진족이나 누르하치의 후금 또한
농경 목축과 함께 수렵이 일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시대 거란의 요나라나
명나라 이북 몽골 타타르를 제압할수 있었던 것이죠.
참고로 12세기 완옌부가 흥기할때 맹안모극제에 포함됬던 순 여진족 인구는 기껏해야
숙여진 생여진 다합쳐 70만 가량에 불과했고 ( 요나라 멸망시키고 북송을 멸망시키면서
거란족,발해인을 정복하여 삽시간에 백만 단위로 늘어나긴 합니다.)
누르하치 시절의 여진족은 건주위 동해여진 예허부족 등 다 합쳐도 기껏해야 30~40만에
불과했고 부족한 군사력과 인구를 팔기군체제로 몽골부족과 요동한족들을 끌어들여
가공할 군사력을 지닌 당대 최강의 군대를 보유했죠.
좀 더 부연하자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절의 팔기 중 순여진족 병사의 숫자는 5만이 안됬고
그외 몽골팔기와 한족팔기 및 한족노예병사로 부족한 숫자를 메웠던 것입니다.
(길공구의 고려사라는 블로그에 그 자세한 내용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그분의 블로그를
찾아보세요)
다시 이야기를 고구려로 돌린다면,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넓은 영토를 기반으로 국가시스템을 발전시켜나가며
농산물의 소출이 증가하고 예전에 비해 생존을 위한 수렵의 비중이 낮아졌다해도
경당이라 불린 청소년교육기관에서 기사와 무예를 연마시키는 훈련을 통해
군사력약화를 방지하여 북으로는 투르크와 물길 서쪽으로는 중국세력 그리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할수 있었습니다.
예전 역사스페셜이었나 역사관련 다큐에서 중국인 학자 왈 " 몽골인 셋이 여진족 한명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고
6세기 말~7세기 초 활동했던 동로마의 역사가 시모카테스(Simokattes)도 자신의 역사서에
고구려에 대한 짧은 소개를 하고 있는데 매우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 유연의 잔여 세력이 중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겨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Moukri는 중국에 인접해 있다. Moukri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시모카테스가 언급한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은 아마도 고구려 경당( or 국당)에서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결론을 내본다면,
아무리 중국을 오랫동안 유린하고 중국인들에게 공포를 안겼던 초원의 유목민족들이라도
평상시 수렵보다 가축을 돌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그들과 달리,
생활의 대부분을 생존을 위한 수렵에 매달렸던 수렵민들의 전투력을 따라오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수렵민들이 부락별로 흩어져 통일적인 거시적 안정적 정치체제를 이루기가 매우 어려워
오랫동안 주변 유목민족 등에 무시받았던 기간이 오래였지만
한번 통일이 되었다하면 그 전투력은 정말 한줌도 안되는 인구를 가지고 유목민족을 박살내고
삽시간에 대륙을 뒤흔드는 가공할 공포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그러했고 훗날 여진족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징기스칸의 몽골부족 또한 본래 유목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라 동몽골의 산림지역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부족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