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도성은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일컫는다.
서해(황해)를 중심으로 구글 지도를 보면.. 삼국시대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을 고려하면 한반도 중부(한강)에서 산동반도로 가는 것은 쉽지 않고요 지금의 요동반도에서 산동반도가 가는 것은 섬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쉬워 보입니다
따라서 중국 고대 여러 문헌들과 삼국시대 선박 건조기술과 항해술을 고려해 보니..
신라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성(중국 대륙으로 통하는 중요한 지역)은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었던 태조 왕건 고려의 서경인 요하근처 요령성 평양(한성)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 고대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요수가 아닙니다
고대 요동은 요동군입니다(고대 요동은 요수 동쪽 지역을 나타내는 일반 명사가 아닙니다)
요수를 기준으로 요동군과 요서군를 나누었다는 문헌 내용은 없으니 요동군과 요서군을 구분하는 기준은 요수가 아닙니다
요동군과 요서군을 나누는 기준이 요수가 아닌 근거는 후한시대에 요서군을 나누어 요동속국을 설치했고, 요동속국이 조조의 위나라 시대에 창려군이 되고 그 후에 요동군에 포함됩니다
■ 고조선 대표유물인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이 중국 산동성 여러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중국 산동성 여러장소에서 출토되었고 산동성에 많이 있었던 고인돌은 중국이 대부분 파괴했습니다
2) 중국 산동성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었고 고인돌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대학 역사교수들은 산동성에는 고인돌도 비파형동검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 산동성 비파형 동검 출토 내용
(1) 중국 산동성에서 고조선 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중국 산동성에서 발견되었다는 논문을 2007년 중국학자가 발표하였고. (2) 중국 산동성에 있었던 수많은 고인돌을 중국이 파과하였지만 지금도 산동성에 고인돌이 존재하는 증거와 (3) 산동성의 고조선 유물에 대해 우리나라 대학역사교수들이 거짓말을 어떻게 하는지는
커뮤니티에서 글을 쓰더라도 출처를 밝히시는게 맞습니다.
1. 비파형동검이 2007년에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보고서가 있을 겁니다. 그걸 제시하여 주세요
2. 고인돌유적을 대부분 파괴하였다
→파괴했다는 뉴스나 보고서가 있을 겁니다. 그걸 제시하여 주세요
3. 산동성에서 비파형동검이 나오고 고인돌이 있으니 고조선영토였다
→대체로 산동성에 래이족이 살았다는 것은 알고있죠. 하지만 바로 고조선의 영토였다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죠. 연결고리를 제시하여 주세요
4. 산동성은 한성백제의 영토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가 한성백제라고 주장하시는거면 산동성에서 한성백제의 유적유물이 나왔다라고 주장하는 논문이나 보고서를 제시하여 주세요
1) (사단법인) 대한사랑의 매림역사TV 동영상에서 제시된 논문을 직접 확인하시면 됩니다
2) 고인돌 파괴도 KBS 역사스페셜 내용이니 확인이 필요하시면 직접 요청하시면 되겠지요
3) 중국 고대 사서 내용으로도 충분히 검증되고 확인이 되지만..
식민사학자들인 역사교수들이 저런 논문을 쓰겠습니까?(오히려 논문 통과를 방해하겠지요)
10년쯩 지나면 논문이 나올 것이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유투브에 나오는 주장을 근거로 삼으시면 역사연구가가 할 행동은 아니죠. 사서와 논문과 발굴보고서를 제시하셔야죠. 전 역사연구가 아니기에 상관없지만요. 제가 글을 올릴땐 연구가님들의 평가를 받고자 올리는 것이지만 수구리님은 역사연구가이신데 근거를 유투브로 삼으시면 곤란하죠.
'한'은 세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한'이요, 둘은 '진한'이요, 셋은 '변진'이다.[왕회분이 진과 양 두 책에 모두 '변한'이라하미 마땅히 고쳐 따라야 한다. 위지도 역시 '변한'이라 기록했다.] '마한'은 서쪽에 있어, 오십사개국이 있으며 북으로 '낙랑'에 접하고, 남으로 '왜'에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어 십이개국이며 북으로 '예맥'에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십이개국으로 남쪽은 역시 '왜'에 접한다. 무릇 칠십팔국으로 '백제'는 그 일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를 거느리고 작은 나라는 수천여가를 거느리니 각각 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땅은 합하여 사천여리이고 동서로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은 가장 커서 함께 그 무리에서 '진왕'을 세워, '목지국'에 도읍하니,[위지에는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하고 위지에서 통지까지 '目'을 '月'으로 썼고, '오십여개국이 역시 월지국이라 짓고 따르니,' 곧 이것은 '목지'의 잘못이다. '월지'는 '서성'국명이다. 위지에서 통지까지 '월지'로 기록하니 '월지'라는 이름이 후세사람이 혹 보고 익혀 고친 것이 아닐까? 마땅히 생각해봐야 한다. ] 다하도록 삼한땅에서 왕노릇하였다. 그 여러나라의 왕은 모두 '마한'의 종류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마한'사람들은 논농사와 양잠을 알고 면포를 지었다. 큰 밤이 나오는데 배만했다. 긴꼬리가 있는 닭이 있어 길이가 오척이나 되었다. 읍락이 섞이어 있으니 또한 성곽이 없다. 흙으로 집을 짓고 사니 모양이 무덤과 같고 출입구가 위로 있다. 꿇어 업드려 절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른과 어린이, 남녀가 다름이 없고, 금은 보화와 비단 그물의 귀함을 모르며 소나 말을 타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오직 큰 구슬로써 옷에 꽤메어 치장하고 귀에 달아 늘어뜨리니 목에까지 이르렀다. 큰 무리를 이끄는 자는 괴두에 상투를 틀고[괴두는 마치 과실수와 같다. 터럭을 둘러 과실과 같이 모여 묶었다. ' '음은 '計'이다.] 베옷에 솜을 틀고, 신을 신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장대하고 용감하여 어린애들도 성을 쌓고 집 짓는데 힘을 쓰고, 문득, 허리에 줄을 매어 큰 나무에 매달리어 소리치며 강건함을 부르짓었다. 항시 오월이면 논경계에서 귀신에 제사지내며 주야로 술마시며 모임을 가지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추다. 문든 수십인이 서로 춤추며 땅을 밝으며 따랐다. 시월 농사일을 마치면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여러나라의 읍락이 한 사람을 주인으로 천신에 제사지내는데 이를 '천군'이라한다. 또한 소도를[위지에 말하길 제국에는 각각 다른 읍이 있으니 '소도'라 한다. 나라가 망하여 도망가 이에 이르면 모두 이를 잡지 못한다. '소도'를 의라하니 이는 '부도(불탑)'와 같음이 있다.] 세워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기었다. 그 남쪽경계는 왜와 가까와 역시 몸에 문신을 하였다.
'진한'은 늙은 노인이 말하길 '진나라'에서 도망한 사람이다. 고역을 피하여 달아나 '한국'에 이르르니, '마한'이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각나라를 '방'이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도적을 '관'이라하고, 술을 '상'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사'라 하니[위지에는 '爲'위에 '皆'자가 있다.] '진'나라 말과 같음이 있다. 고로 혹 말하길 '진한'이라 한다. 성책과 집이 있고, 모두 작은 별읍이 있어 각각 우두머리가 있다. 큰 우두머리를 '신지'라 하고 다음은 '검칙' 다음은 '번지'[위지에는 ' '이 '穢(예)'로 적혀 있다.]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이다.[모두 이는 관명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좋으며 오곡이 마땅하고 양잠을 알아 비단을 지었다. 소와 말을 타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예가 있고 길가는 자는 서로 길을 양보하였다. 나라에 철이 나오니 '예', '왜', '마한'이 함께 쫓으니 이를 거래 하였다. 무릇 철로 무역하니, 모두 철을 재화로 하였다. 풍속이 가무에 음주하고 북치고 거문고 타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우두머리를 시키고자 머리를 편편하게 하니, 모두 돌로써 머리를 눌렀다. ['扁'음은 '보전'으로 바뀌었다.]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깨져 이에 장수와 남은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이를 깨뜨린후 스스로 '한왕'에 올랐다. '준'후로 망하여 끊어졌다. '마한'사람들이 다시 스스로 '진왕'이라 하였다. '건무' 이십년 '한', '염사', '소마시' 사람등이 이르러 '낙랑'에 조공하였다.['염사'는 읍의 이름이다. ' '음은 '是'이다.] '광무'가 '소마시'를 한의 '소마읍군'에 봉하고 사신으로 '낙랑군'에 속하게 하니 사시 알현하였다. '영제' 말에 '한','예'가 함께 흥하고, 군현이 능히 제도 하지 못하자 백성들이 괴롭고 어지러워 많이 떠돌아다니다. '한'으로 들어갔다.
○ 濊(후한서 동이열전 내용)
濊 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고] 조선의 지역이다.
(그리고 한韓이 모두 옛 '진국'이라고 했으니 마한,진한,변진도 고조선 지역입니다)
元朔 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集解】惠棟曰, 顏籀云, 南閭者, 薉君之名.
원조 원년(B.C.128) 에 예의 임금 남여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에 귀속하였으므로, 한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그래서 창해군이 폐지된 지역은 예전의 예濊로 남게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 平準書(사마천 사기 평준서: 한무제 BC 128년 내용)
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燕), 제(齊) 사이가 바람에 휩쓸리듯 소란해졌다.
(고조선 영토에 한나라 창해군을 설치했으니 고조선인들이 걱정하고 반발해서 소란스럽다고 표현했을 것이고, 고조선인들의 반발로 창해군이 몇년 후에 폐지되었기에..
예濊의 정확한 위치는
제나라와 연나라 사이인 하북성 중부 동부해안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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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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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군인 예濊의 정확한 위치는 제나라와 연나라 사이인 하북성 중부 동부해안 부근이고
1) 예濊의 남쪽이 진한이니 진한의 위치는 산동성 동부가 됩니다
2) 진한 서쪽인 산동성 동부 서쪽이 마한의 위치이니 마한은 산동성 서부가 되고요
3) 예濊의 서쪽이 낙랑이니 낙랑의 위치는 하북성 중부가 됩니다
4) 예濊의 북쪽에 고구려와 (동)옥저가 있으니
고구려와 (동)옥저의 위치는 하북성 북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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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치매환자이고, 두뇌도 없는 짐승 종자새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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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 분들은 잘 아실 것으로 판단됩니다
1번은 이미 답변드린 내용이고요
2번은 당나라 시절에 유주와 정주가 이웃에 있었으니 전혀 이상하지 않고요
(구르뫼님은 정주와 유주를 어디에 비정하시는지 궁굼하고요
유주와 정주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상해 보이겠지요)
사실은 구당서 기준으로(신당서는 큰 부분은 비슷하지만.. 다르게 표현된 내용이 있습니다)
당태종이 정주에, 당군이 유주에 있었다는 명확한 내용이 없습니다 당군이 유주에 있었다고 문헌 내용이 있고,
태자가 정주에 있었다는 내용이 있지요
다만 다른 내용으로는 당태종이 정주에서 요동으로 떠나는 당군을 격려했다는 내용이 있으니,
일반적으로 당군은 유주, 당태종은 정주라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주에서 요동으로 가는 방향에 정주가 있으니
유주가 형태시 동쪽 부근, 정주가 덕주시 서쪽 부근으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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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은 여기까지 하고요(나머지 질문한 내용 중 상당수는 제가 쓴 글에 이미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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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은 어디에 나오는 문헌내용인지 알려주시고요
위만조선, 한사군 위치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제가 질문 드립니다 그래야 공평하지요?
4번 요수를 어느강으로 보시는지?..
5번 패수, 열수, 대수를 어느강으로 보시는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 흐름이 많이 변할 수 있는 하북평야 이기에
고대 강의 흐름으로 지금의 강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곤란한 질문이었나 보네요...
하북성 중부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거의 없지요.
요수가 북쪽으로 흐르는다는 것도 수구리님 때문에 처음 알았고요.
전에도 말했지만 이미 수구리님이 비정한 위치는 전쟁시뮬레이션 등 다양하게 해보고
최종 탁록성이 있는 하남 신향시 부근을 제외하고는 가설 부적절으로 폐기했습니다.
저는 섬서성에서 자료를 조사중이기에 적은 자료로 비정을 할 수 있으나 시간을 두고 조사중입니다.
상기 하남 신향현과 위현 쪽에서 고증이 수구리님 주장보다 사서에 더 부합하네요.
낙양 비간묘 업 정주 유주 북평 요택 요수 마수산 요동성 안시성
당대 교통로와 일치하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도 있으며
당대 교통로를 무시한 진군을 믿으라니 ???
그리고 형태시와 덕주시가 이웃하는 거리라니 직선거리 170km가 이웃 거리라니 헉...
당태종이 북평에 도착하고 이세적의 뒤를 따라 가는데
아무리 아전인수한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요.
그래도 사기나 한서 등 상고사를 연구해 나름대로 주장을 펼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기대했는데 실망이 크네요.
왜 여러 사람이 수구리님에게 근거자료를 요구하는지 알면서도
그래도 기대했었는데 ???...
끝까지 실망시키네요.
사서를 인용한 창작 소설은 그만하는게 나을듯 하여
수구리님 비정의 핵심인 갈석산의 모순을 공개합니다.
갈석산(장석암:형태시 서북) 고죽국(석가장 부근) 요수(부양하)
晉書에 이르길
遂進師,經孤竹,越碣石,次于遼水。
文懿果遣步騎數萬,阻遼隧 堅壁而守南北六七十里,以拒帝。
마침내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서 요수(遼水)로 향하였다.
공손연은 과연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어, 요수(遼隧)를 막고,
벽(壁)을 견고히 하여 남북으로 6-70리를 수비하며 사마의를 막고 지켰다.
사마의는 고향인 하남 온현에서 지인과 잔치를 하고 공손연을 진압하기 위해
온현 → 고죽국 → 갈석 → 요수(遼水) → 요수(遼隧) → 양평(襄平)
갈석은 고죽국 위에 있어야 하는데 갈석이 고죽국 아래에 있다.
또 갈석을 지나 요수(遼水)를 지나야 하는데 헐 요수를 이미 지났다.
창작소설은
정사인 晉書와 비교해 갈석을 기준으로 고죽국과 요수를 반대로 비정했다.
또한 한나라 상흠(桑欽)이 지었다는 수경(水經)의 물흐름을 반대로 만들었으며
상기 晉書의 남북 6~70리의 벽은 요수(遼水)를 따라 배치된 상황으로
사마의는 요수현을 우회하여 북쪽의 양평(襄平)을 공격한다.
이 상황의 남북 6~70리의 벽은 요수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누어진 요서 요동이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상당히 길어지니 요점만 쓰죠.
1. 고구려 태조왕시 요서10성을 세우니 유성을 점령하고 여기에 요동성을 세웠다면 ???
2. 요서10성을 세웠다면 기존 요수를 넘어갔다는 말이며 새로운 국경선(요수)이 생기며
이 요수가 당태종이 넘어간 요수일 확률이 높죠.
3.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 전달하는 내용은 유주(연경)를 두고 중국과 고구려의
각축전이 이어지며 최종 당태종 시기에 당나라 영역이 되었다.
이 내용이 합리적이 아닐까요?
상기 수구리님 댓글을 보며 상흠(桑欽)의 수경(水經)은 한나라시 문헌 아닙니까?
요수는 동남쪽으로 흘려 전체적으로 남류하다 동으로 흐르는 강입니다.
(수구리님의 주장처럼 북류를 한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진서가 후대에 나왔다고 해도 고구려 존속시 지리를 포함하고 있고
핵심은 고죽국(요서)과 요동 근처에 갈석이 있어야 하며
중국의 입장에서는 고죽을 지나 갈석에 가는 행로이며
이는 시대를 떠나 이 지형구조는 불변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쓸 글로 갈석의 의미가 될 것 같네요.
갈석과 갈석산은 다름을 말씀 드립니다.
''삼국시대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을 고려하면 한반도 중부(한강)에서 산동반도로 가는 것은 쉽지 않다''라고 지껄인거부터 설명좀 해봐라. 백제가 산동에서 건국했는데 그리 서해를 건너기가 힘들면 이 땅에 오지도 않고 망할 때까지 산동 지역에 있었다는거냐 원숭아? 답을 할 능력이 없으면 없다고 시인하던가 무시하고 지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