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서 서경을 중심으로 하여 왕건부터 정종까지 살펴봤습니다
고려는 발해 멸망 후 서경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경이라 후에 이름 붙인 평양 지역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황폐하게 버려진 평양을 서경이라 이름 붙이고 성을 짓고 사민을 하여 개척합니다
이 국가적 사업은 그 후대에까지 계속되는데요 정종 역시 서경에 크게 토목사업을 벌이다가 일찍 죽자 노동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기뻐 날뛰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고려 초기의 평양은 국가적 노력이 투입될 만큼 중요한 곳이었고 또 그만큼 처음에는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신라가 935 년에 자진 복속되고
후백제가 936 년에 멸망하는데
평양은 태조 원년인 918 년부터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고려가 발해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사실은 태조 8 년 925 년 기사에도 나오는 만큼 당연한 사실인데요
우리는 익히 대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나누어 가진 만큼 후고구려, 즉 고려 역시 초기의 북계가 대동강 이남이었으리라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당나라의 도호부가 북쪽으로 옮겨간 사실이나
이후 당나라가 요동 이동, 이남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한 사실 등에서
과연 신라가 이러한 정황 속에서 대동강 이남만 먹고 말았을까 하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고 봅니다
또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고려의 북계에서는 흑수말갈이 활동을 하며 귀부해 오기도 하고 거란이 활동하며 조공품을 보내오기도(922년) 합니다
즉 발해가 멸망하기 전부터 고려 북계와 접한 요동, 남만주 일원에 대하여 발해의 통제력이 이미 상실돼 무정부 상태와 다름 없이 돼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고려는 남쪽으로 후백제를 제압하는 것에 힘을 씀과 동시에 북진을 경주했다고 보여집니다
발해 유민의 고려 망명은 925 년을 시작으로 근 2 세기 동안 계속됩니다
이러한 발해 유민의 대거, 지속 망명은 고려의 정통성과 함께 북진 정책에 명분을 더해 주었으리라 보입니다
발해 말기와 멸망 직후에 흑수말갈을 중심한 여진족이 요동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횡으로 퍼져 활동하면서 거란과 고려의 직접 접촉의 완충역할을 하였고
이 상황에서 광종 때에 '생여진을 몰아내고 요나라 동경부터 안북에 이르는 수백리'를 개척'하는 북방 영토 획득이 가능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고려의 북방 영토는 금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요동 남단으로 축소가 되며 이러한 상황은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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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년 발해 멸망
935 년 신라 복속
936 년 후백제 멸망
고려사 기록 중 서경을 키워드로 한 초기 기록 요약 발췌
<918 년 9 월 (음) 태조 1 년>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지(諭旨)를 내렸다.
“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있다. 숲이 울창해 번인(蕃人 : 女眞族)들이 그 곳에서 사냥질하느라 옮겨다니면서 변경 고을을 침략해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 백성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국경의 방어태세를 튼튼히 해 후대에 길이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는 사촌 동생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 수비하게 했다.
<919 년 10월 (음) 태조 2 년>
평양(平壤)에 성을 쌓았다.
<921년 태조 4 년>
2 월ㆍ4 월 (음)
흑수 말갈 등의 귀순
10월 20일(음)
왕이 서경에 행차하다
<922년 미상>
고관의 가족을 서경으로 이주시키고 내성을 쌓다
이 해에 대승(大丞) 질영(質榮)과 행파(行波) 등의 가족[父兄子弟]과 여러 군현(郡縣)의 양가(良家) 자제를 이주시켜 서경(西京)을 충실하게 하였다.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새로 관부와 관리를 두었으며 비로소 재성(在城)을 쌓았다. 〈왕이〉 직접 아선성(牙善城) 백성이 거주지를 정하였다.
<925년 태조 8 년>
3월 (음)
왕이 서경(西京)으로 행차했다.
9월 (음)
발해(渤海)의 장군인 신덕(申德) 등 5백 명이 투항해왔다.
발해의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과 대균로(大均老), 사정(司政) 대원균(大元均), 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暮), 좌우위(左右衛) 장군(將軍) 대심리(大審理) 등이 1백호를 거느리고 귀부해왔다.
12 월 (음)
발해의 좌수위(左首衛) 소장(小將)인 모두간(冒豆干)과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등이 백성 1천호를 거느리고 귀부해왔다.
<926년 12월 (음)>
왕이 서경에 가서 초제를 지내다
<929년 4월 6일(음)>
왕이 서경의 주진을 순시하다
<930년 5월 29일(음)>
왕이 서경에 행차하다
<930년 6월 8일(음)>
왕이 귀경하다
<930년 12월 1일(음) 태조 13 년>
서경에 학교를 열다
겨울 12월 경인 〈왕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학교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931년 11월 28일(음)>
왕이 서경 및 주진을 순시하다
<932년 5월 3일(음)>
신하들을 경계하는 유지를 내리다
<934년 1월 (음) 태조 17 년>
왕이 서경에 가 북방 진들을 순시하다
<934년 미상>
서경에 재해가 발생하다
<935년 9월 2일(음) 태조 18 년>
왕이 황주와 해주를 순시하다
<938년 7월 (음) 태조 21 년>
서경에 나성을 쌓다
<943년 4월 (음) 태조 26 년>
왕이 훈요10조를 내리다
다섯째, 내가 삼한(三韓) 산천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서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뿌리가 되고 대업을 만대(萬代)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네 계절의 중간 달[四仲月]에 왕은 그 곳에 가서 100일이 넘도록 체류함으로써 〈나라의〉 안녕(安寧)에 이르도록 하라.
<947년 미상 정종 2 년>
서경에 왕성을 쌓다
<949년 3월 13일(음) 정종 4 년>
왕이 죽자 역부들이 기뻐하다
3월 병진 왕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동복아우 왕소(王昭)를 불러 왕위를 넘기고 제석원(帝釋院)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훙서하니, 왕위에 있은 지 4년이며 나이는 27세였다. 왕의 성품이 부처를 좋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서, 처음에 도참설(圖讖說)을 따라 도읍(都邑)을 서경(西京)으로 옮기기로 결의하고 장정[丁夫]을 징발하여 시중(侍中) 권직(權直)에게 궁궐(宮闕)을 건축하게 하였다. 노역(勞役)이 그치지 않고 또 개경(開京)의 민호(民戶)를 뽑아서 〈서경을〉 채웠으므로, 많은 백성이 따르지 않고 원망과 비방이 들끓더니 왕이 훙서하였다는 말이 들리자 역부(役夫)들이 기뻐 날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