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에서 말하는 진나라는 2개입니다. 양쯔강 이북의 서진(西晉, 265년 ~ 317년)과 양쯔강 이남의 동진(東晉, 317년 ~ 420년)이 있읍니다
동진말엽이라고 하기에는 광개토대왕이 활약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백제는 대응할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진 말엽이라고 볼수 있는데 미천왕이 활약하던 시기와 겹칩니다.
한사군의 낙랑은 요동으로 비정할 경우 미천왕은 서기 313년 서안평을 점령하고 낙랑을 멸망시켰으니 낙랑이 요동에 있다면 사서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때 백제는 10대 분서왕(汾西王/298~304)때 이미 낙랑군의 서쪽 현을 점령(304년)했다고 하니 사서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양서, 남사, 통전의 기록은 모두 이 사건을 언급한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선후관계로 보면 낙랑군을 나눠먹으면서 백제가 먼저 요서를 점령하고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했다가 되겠네요
비슷한 시기이다 보니 중국 사서가 시간순서를 착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제가 어떻게 요서를 점령할 수 있었을까요?
이때 서진은 팔왕의 난(291~306)과 영가의 난으로 멸망직전에 있었고 본격적인 5호 16국 시대가 도래하던 시점입니다
16국 중 요동지역에 일어난 국가는 후조(319년-351년), 전연(337년-370년),후연(384년-407년) 등으로 분서왕이 낙랑을 점령할 당시(304년)요동,요서는 낙랑군외에는 무주공산이었습니다
따라서 손쉽게 낙랑군을 멸망시킬 수 있었고 일시적으로 영토를 영유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후 강력한 왕조인 후조,전연,후연이 들어서자 해안선을 따라 남하해서 무주공산인 산동반도쪽으로 와서 오랜동안 영토를 확보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산동반도에 당시 유목민족이 국가가 없습니다. 유목민족이라 해안가를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북위가 양쯔강 이북을 거의 통일한 뒤 그제서야 백제 영토가 눈에 띄었을 것이고 489년에 쳐들어 왔으나 동성왕이 보낸 목간나 등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렇게 보면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왜 이런 기록들이 남조 왕조들에게서만 남아있냐 하면 북조 왕조들은 유목민족들이라 기록을 소홀히 했을뿐만 아니라 누락된 기록이 많기 때문입니다
북제의 위수(魏收)가 쓴 북위서는 정사인데도 예사(穢史, 더러운 역사)라고 할만큼 신빙성이 없습니다
만약 산동반도의 백제가 남조 국가보다 일찍 멸망하였다면 기록을 했겠죠.
하지만 없는 것으로 봐서는 양나라때(502년~557년)까지는 존속했을 듯 합니다.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 이후 망했다면 유목민족국가인 수나라가 제대로 기록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죠
554년까지 백제에는 성왕이 다스리고 있었죠
그리고 서해안은 그당시 조선기술로도 연안을 안거치고 충분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침공할때 연안해안이 아니라 바로 바다를 건너왔으니까요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직전까지 가서도 곧바로 회복하고 또 신라를 국력으로 압도할 수 있었던것도
산동지방의 영토를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그쪽지방의 물자와 인력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백제의 요서 점령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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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고려는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이른다.
其後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송서》 97권 동이열전 백제(5세기 후반)[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晋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남제서》(南齊書), 《건강실록》(建康實錄)(537년 이전)
진나라 말기, 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낙랑도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6]
晉末 駒麗畧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양직공도》 백제국사(6세기 전반)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晉世 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양서》 54권 동이열전 백제(7세기 전반)
진나라 시대, 구려가 앞서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晉世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남사》 79권 동이열전 백제(7세기 중반)
백제의 산동 반도 점령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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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위나라 오랑캐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6세기 전반)
건무 2년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지난 경오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6세기 전반)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지만,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진수가 말하길, 삼한은 78개국이고, 백제는 그 중 하나이다.】 【이연수의 사서에는, 그 전에 백가가 바다를 건넜는데, 후에 강성한 국가를 세웠으므로 백제라고 하였다. 진나라 시기에, 구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에 의탁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陳壽曰: 三韓凡七十八國, 百濟其一也. 據李延壽 史, 其先以百家濟海, 後浸强盛以立國, 故曰百濟. 晉世 句麗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무황제 상지하 영명6년(488) 12월조.
10년 위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26권 백제본기 동성왕(12세기 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