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그는 고구려 백제와 신라가 다른 점을 강조하였다. 고구려·백제는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유독 신라는 6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선진(先進)문물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저자는, 신라가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서쪽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고 중국에 못지 않은 선진 문물을 수입하였으므로 굳이 중국에 기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고 있던 新羅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先進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ㅡ
ㅡ요시미즈氏는 한국과 중국 측의 史料를 검토하여 진한(辰韓.신라의 모태. 지금의 경상도 지방 부족국가)이 중국의 서진(西晉)에 조공한 서기 286년 이후 91년간 공백, 신라가 전진(前秦)에 조공한 382년 후 126년간 공백, 북위(北魏)에 사신을 파견한 521년 이후 43년간 국교 공백의 상태였음을 적시하면서 이것은 미스터리라고 규정했다.
<신라는 이웃 백제·고구려가 중국의 정치·경제제도를 도입하고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도 이에 동조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자국(自國0의 정치제도나 경제시스템, 또는 문화 전반에 걸쳐서 자신을 갖고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고도의 내용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분의 출토 유물을 분석하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 저력은 로마문화에서 나온 것"이란 주장도 하였다.
요시미즈 씨는, 우리 고고학자들이 스키타이-흉노 초원(草原) 문화의 결정체라고 보는 신라금관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로마계통의 왕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적석목곽총(積石木槨墳)에서 나오는 수많은 금팔찌, 금귀고리, 보검(寶劍), 유리 공예품 등을 분석하였다. 상당수가 로마에서 온 것이든지, 로마적인 것이 중앙아시아-초원 루트를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로마문화 원류(源流)의 유물이란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나온 유리 그릇 가운데는 로마에서 수입한 것도 있지만 로마의 유리 기술자가 신라에 들어와서 신라의 시설을 가지고 만든 것도 있다고 썼다.
4~6세기 신라는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 로마세계와 교류했고 이는 신라 지도부가 이 문화 루트를 잘 아는 흉노족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했다. 서방으로 통하는 창을 열어놓고 있었던 신라는 6세기 중반부터 중국으로 방향을 튼다.
신라의 이런 입장변화는, 5세기에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西로마 제국이 멸망하고(476년),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방이 사라진 때라고 이 책은 주장했다. 北중국을 통일했던 선비족(鮮卑族.유목기마민족)의 나라 북위(北魏)도 신라처럼 로마와 교류했으나 西로마가 망한 18년 뒤 수도를 대동(大同)에서 중원(中原)의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로마와 단절한다. ㅡ
한 육칠 년 전에 KBS에서 큰 돈을 들여서 황금보검과 인면구슬을 추적하는 다큐를 제작, 방송한 바 있습니다
황금보검의 경우 일방적 헌납이나 하사가 아니라 주문제작, 혹은 맞춤제작품으로 고증을 하였고 이는 투후 김일제로 상징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기마민족과 신라 지배층 사이의 모종의 친연성을 추정케 하는 정도로 정리를 하였고
인면구슬의 경우 이미 3~4세기 이전부터 현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열도를 생산기지이자 중심교역지로 하는, 동쪽으로는 한반도, 서쪽으로는 로마를 잇는 활발한 해양무역로가 형성돼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인면구슬의 백조는 인도의 힌두문화, 백인안면상은 로마의 어떤 인물을 형상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신라 금관의 경우
이미 고구려에 금관이 있었고
신라 뿐만 아니라 고구려, 가야, 백제 모두 성인 남자는 상투를 틀고 그 상투를
정수리를 덮는 크기의 고깔을 써서 가리고
그 고깔을 새깃이나 꽃, 금은 장식 등으로 꾸미는 전통이 있었고
이러한 고깔모자를 테두르는 둥근관 형태가 이들 나라에서 나타나 있었으며
이러한 양식과 그 문화는 부여 유물의 상투와 고깔로도 관찰이 되므로
이미 부여, 더 거슬러 고조선(3조선/3한)의 고유문화를 공유하고 계승한 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삼한 사회가 소도가 있고 천군(단군)이 있고 그곳에서 신목이 있었던 점에서
하늘과 새와 신목을 숭상하는 우리 고유의 종교적 세계관이 신라 금관의 양식에 투영됐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신라금관만 유독 화려한가
이는 김씨가 박씨와 석씨를 누르고 신라 왕권을 완전장악 세습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성골과 진골을 만들고
또 김씨를 석가모니족이라는 식으로 프로파간다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금관의 나무는 석가모니 어머니가 석가모니를 옆구리로 낳을 때의 장소였던 그 나무를 의미한다 볼 수도 있읍니다
김정민 교수에 의하면 스키타이족이 한반도로 넘어와 신라(新羅)를 세웠거나 적어도 이들 스키타이족이 신라의 지배계층 즉 왕족(王族)이었다고 합니다.
신라는 스키타이족이 세운 고대 왕국으로서 같은 한반도 안에서도 무덤 양식 등 유적(遺跡)을 비교해볼때 몽골 계통으로 분류 되는 고구려, 백제와도 확실히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정민 교수의 관점은 고구려, 백제와도 구별 되는
스키타이족의 문화적 특징이 유독(唯獨) 신라 유적에서 발견 되어 왔으며 이는 신라가 고대 이란인 즉 스키타이족이 세운 왕국임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라는 입장인 것입니다. 김정민 교수는 신라의 화랑(花郞)들이 얼굴을 하얗게 화장(化粧)하는 풍습 역시 스키타이족의 후손(後孫)인 화랑들이 본래 자신들의 조상(祖上)인 스키타이족의 외모 즉 외형적 정체성을 드러내 표방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정민 교수는 경주에 있는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天馬圖)의 목판이 시베리아산 자작나무인 까닭 역시 신라의 지배계
층이 본래 한반도로 이주(移住)한 북방계 유목민족 즉 스키타이족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출처] 스키타이와 신라 / Y-DNA / Y 하플로 그룹 / 한국인 유전자 / 김정민 교수 / 소호금천 / 미국vs중국|작성자 패왕
실제로 이러한 장식의 칼이 4세기 말에서 7세기대의 서(西)시베리아·중앙아시아 등지의 고분들에서 출토되고 있다. 계림로 보검과 매우 유사한 의장을 지닌 칼의 실물 예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로웨에 출토품이 있는데, 5세기대로 편년되고 있다.
그 외에 실물은 아니지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의 벽화에는 이 보검과 유사한 단검을 패용한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자료들로 보아 계림로에서 출토된 이 보검도 역시 중앙아시아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 보검은 신라와 중앙아시아와의 문화 교류를 증거하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멀리 동유럽과 서역에 걸친 넓은 분포권을 둔 이 보검이 어떤 이유 때문에,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동쪽으로 1만 킬로미터 이상이나 멀리 떨어진 신라의 수도 경주의 조그마한 고분에 묻히게 된 저간의 사정이 궁금하다.
아마도 그 해답은 중국의 북위(北魏)와 신라의 정치적 관계를 알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 듯하다. 북위는 페르시아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나라와 활발한 정치·경제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각국과 활발하게 문물을 교류했다.
북위의 수도에는 늘 많은 외국인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고구려와 신라의 조공 사절도 자주 왕래하곤 했다. 이처럼 역동적인 국제 교류관계로 인해 이 보검이 신라로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자그마한 이 보검은 신라문화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웅변해주고 있다.
스키타이의 개국설화에 따르면 해라클레스(영어로는 허클리스 - 아마도 백인계로 추정)와 티벳의 공주(황인종으로 추정)과 사이에 난 세 아들의 후손을 스키타이족이라 합니다. 원 스키타이는 백인이 아니고 백인과 황인의 혼혈종이란 말입니다.
이 세아들의 이름이 케사르(첫째 = 동방) - 징기스(둘째 = 서방) - 에후사밧(이 이름을 지금 생각이 안남 나중에 확인하고 다시 쓰겠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퉁구스는 만주어나 몽골어로 장남이란 말로 케사르 족을 말하는 것 이에요. 징기스는 몽골 징기스칸과 같은 말로 몽골 왕실은 스키타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는 케사르(게르 - 그루)계열로 퉁구스 족이고 백제는 징기스(또는 진왕- 기는 왕의 고대어 또는 다른말 입니다) 계열이고 가야가 막내 계열이란 말이죠.
신라는 박혁거세가 건국 했는데 거세가 케사르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북부여(퉁구스 = 고구려)에서 분리된 나라라고 기록이 된 것이라 보이고요. 또한 박혁게세는 이름이 아니라 직위명이라는 것을 알수 있죠. 박혁거세는 거세가 황제라는 의미로 현재 쓰이기에 박혁제 또는 박혁대제 이런 의미란 말이죠.
게세(케사르)는 쓰기는 케사르(거세)라 쓰지만 발음은 카이저스라 합니다. 이 케사르 족이 서쪽으로 가서 로마를 건국하고 로마문명을 건설 하는 것이죠. 말했다 시피 케사르가 조선과 같은 말이고 동방(동국 = 동아)이라 불리워 지며 또한 퉁구스 이면서 고구려 입니다.
가야는 김수로와 허왕후의 후손인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연맹체 인데 금관가야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마도 백제계열의 한족漢族일 가능성이 높고 금관가야만 스키타이 계열입니다.
이미 고고학적으로 한국인은 백인과 황인의 혼혈종이라는 것은 확인 되었고요. 따라서 스키타이 입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허황후를 인도(북천축으로 지금의 캬슈미르나 카자흐스탄)지역에서 온것이 아니라 보주에서 온것이라는 가설로 김해김씨 종친회와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송에서 확인 된 것은 금관가야 주변의 고분의 인골에서 코카시안 유전자가 대량으로 나오고 허 황후가 가져온 파고다로 추정되는 탑이 인도 원석으로 밝혀짐으로 종결 되었는데 아직도 보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죠.
금관가야는 스키타이 왕후족이 건국한 나라란 말이죠. 그런데 스키타이 전설에서 보듯이 왕후족이 적통입니다. 헤라클레스가 신분이 낮고 티벳공주가 신분이 높아요.
다시 말해서 신라와 금관가야의 처음에는 금관가야가 신라보다 신분이 높은 나라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계급이란 말이죠. 기록에도 신라보단 금관가야가 높게 나옵니다.
스키타이 문화 양식이 한반도 고대국가와 비슷했던것은 저는 반대로 동북아(고조선) 문화가 중앙아시아에 영향을 미친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존의 스키타이 >> 고조선으로 보는건 서양중심적 시각일 뿐이고,
서양인들의 시각에서는 스키타이가 강력한 세력이었겠지만, 비슷한시대의 흉노나 고조선의 세력에 비하면 그저 흔한 변방의 유목민 집단일 뿐입니다.
국가적인 조직력, 군사력등으로 봤을때 동북아 지역에서 (고조선, 흉노) 동유럽 근방 유목민들에게로 문화가 전해진것이라 보는게 타당합니다.
신라에서 발굴된 황금보검에는 삼태극이 세공되어 있습니다.
같은 양식의 보검이 세계에서 3자루 발굴되었는데 이런 삼태극 세공은 신라것에만 있는것이죠.
즉, 신라에서 발굴된 이검은 지금의 한반도의 문화권을 이룬 세력에게 보낼 목적이거나 같은 문화권을 가진 집단이 만든것입니다.
로마가 황금에 값비싼 보석 세공을 해서 신라에 팔기위해 이런검을 만들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신라라는 나라에 대해 잘알지도 못할텐데요.
당연히 신라에 대해 모르니 로마에서 외교적인 목적으로 만든것도 아닙니다.
삼태극을 넣었다는것은 동북아 문화에 대해 잘알고 우호적인 세력이 만들었다는것이고, 값비싼 보석과 세공을 봤을때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만들었다는것입니다.
동유럽에는 동북아적인 영향을 받았던 몇몇 세력이 있었습니다.
불가르족의 영향을 받은 불가리아와 훈족이 정착했던 헝가리, 마자르족이 정착한 핀란드.
불가리아는 부여계 혹은 부여와 비슷한 문화를 가졌었던 세력이 정착했던것으로 보이고,(사비,소피/ 밝안, 발칸/ 고추가 등등)
훈족의 훈은 자기스스로 유럽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말로 유럽인들 발음으로는 '한'에 가깝습니다.
동북아에 동이구족, 구한, 구려 라고 불리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한이라고 소개한것은 동북아쪽, 더 나아가 넓게 봤을때는 고조선계통 이라는 겁니다.
나중에 훈족이 있던곳에 마자르족이 있었다는것에서 유럽학자들은 훈족이 사라지고 핀란드쪽에서 마자르족이 내려와 정착했다고 봤지만,
어차피 9한의 한(韓)족이나 말갈족이나 같은 부족입니다.
훈족의 나라가 분열되자 일부는 동북아나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고 일부는 남고 그런것이겠죠.
신라와 교류를 하거나 유물이 흘러들어온곳은 이쪽 헝가리방면의 훈족(마자르족)이 아닐까 합니다.
서양 학자들은 유물을 근거로 이 훈족의 발원지를 신라로 추정했었지요.
문제는 신라가 그 먼곳까지 그런 대규모 병력을 움직였을리는 없다는거죠.
하지만, 훈족세력이 기록보다 소규모 집단이었을수도 있습니다.
이는 이후의 몽골의 유럽침공에 대한 서양의 기록을 봤을때,
유럽으로 침공해 들어온온 몽골군이 10만이상 이라고 기록했지만,
현대에와서 유럽 사학자가 보급의 관점에서 당시 몽골군의 군마가 먹을 건초나 보급 등등을 가정했을때 기병을 3만으로 보는것조차 무리라는게 밝혀졌죠.
당시의 유럽의 목초지로는 몽골은 많게 잡아도 기병을 1만5천 정도밖에 감당할수 없었을거라고 합니다.
훈족의 침공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곳을 동시에 공격하며 많게 보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적은 소규모 부족이었을수 있습니다.
또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나 진한(만주, 부여)쪽 부족이 이후에 신라로 유입되며 이런 유물을 가져왔을수도 있구요.
신라는 김씨왕이 처음 왕위에 오를무렵 특정시기에는 고구려의 입김이 굉장히 강했었습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의 매형, 피가 안섞인 아들, 이성동복형제...이런식의 가족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