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지리지는 그 특유의 괴랄함으로 인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가된다.(사실 지리지 뿐만 아니라 <요사> 자체가 오류 투성이로 평가된다.) 없는 사실까지 지어낸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평가받지만, 지리지 내용의 연혁 내용에 상당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데, 해당 지역의 연혁을 알맞게 서술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의 연혁을 서술하는 등의 모습도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교차검증을 통해 <요사>지리지의 오류임이 밝혀지는 것이 적지 않은데, 아래의 동경요양부조도 마찬가지이다.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周武王釋箕子囚,去之朝鮮,因以封之。作八條之敎,尙禮義,富農桑,外戶不閉,人不爲盜。傳四十餘世。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는 원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석방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떠났고 이에 그 곳에 봉해졌다. 8개조 교화의 법을 만들어 예의를 숭상케하고 농잠(農桑-농사와 누에치기)으로 부유케 하니, 집 바깥에 문을 닫지 않아도 도둑질하는 일이 없었다. (기자의 작위는) 40여 대로 전해졌다.燕屬眞番、朝鮮,始置吏、築障。秦屬遼東外徼。연(燕)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켜, 관료들을 두기 시작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나라는 (이곳을) 요동의 외요(外徼)로 속하게 햇다.漢初,燕人滿王故空地。武帝元封三年,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한(漢)나라 초기에는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옛 공지(空地)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4군(郡)을 만들었다.後漢出入靑、幽二州,遼東、玄菟二郡,沿革不常。漢末爲公孫度所據,傳子康;孫淵,自稱燕王,建元紹漢,魏滅之。晉陷高麗,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爲平州牧居之。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唐高宗平高麗,於此置安東都護府;후한(後漢) 때에는 청주(靑州)에 편입되었다가 유주(幽州)로 복귀했는데, 요동(遼東)과 현도 2개 군만 남았으니, 그 연혁이 상세하지 못하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가 (이곳에서) 할거하여, 아들인 공손강(公孫康)과 손자인 공손연(公孫淵)에게로 이어졌는데, (공손연이)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소한(紹漢)을 연호로 하였는데, 위(魏)나라가 그를 멸망시켰다. 진(晉)나라 때에 고구려[高麗]에 함락되었다가, 뒤에 모용수(慕容垂)와 그 아들 모용보(慕容寶)에게로 돌아갔었는데, 고구려왕 안(安-광개토대왕)이 평주목(平州牧)으로 삼아 그곳에 거주했다. 북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낼 때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렀으니, 요(遼)나라 동경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여 이곳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삼았다.後爲渤海大氏所有。大氏始保挹婁之東牟山。武后萬歲通天中,爲契丹盡忠所逼,有乞乞仲象者,度遼水自固,武后封爲震國公。傳子祚榮,建都邑,自稱震王,倂呑海北,地方五千里,兵數十萬。中宗賜所都曰忽汗州,封渤海郡王。十有二世至彝震,僭號改元,擬建宮闕,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爲遼東盛國。忽汗州即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太祖建國,攻渤海,拔忽汗城,俘其王大諲譔,以爲東丹王國,立太子圖欲爲人皇王以主之。훗날 발해(渤海) 대(大)씨가 (이곳을) 소유하게 되었다. 대씨는 처음엔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점유하고 있었다. 무후(武后-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핍박받자,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사람이 요수(遼水)를 건너 (동모산에) 세력을 잡으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했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게 (작위가) 전해졌을 때,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을 자칭하며, 해북(海北)지방을 병탄하니 사방 5천리로, 그 병력이 10만에 달했다. 중종(中宗)이 그 도읍지의 이름을 홀한주(忽汗州)로 하였고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했다. 12대인 대이진(大彝震-걸걸중상으로부터 12대에 해당되며 대체로 11대 임금으로 봄) 때에 참호(僭號-황제를 의미)를 사용하고 궁궐을 그(황제) 격에 맞게 세웠으니, 5경 15부(府) 62주(州)를 보유하였으며, '요동성국(遼東盛國)'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홀한주는 곧 옛
평양성이니,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로 불리게 되었다. (요나라)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면서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공략하여 그 왕 대인선(大諲譔)을 사로잡았는데, 이에 (발해를) 동단왕국(東丹王國)으로 만들어 (자신의) 태자 도욕(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그를 다스리게 했다.神冊四年,葺遼陽故城,以渤海、漢戶建東平郡,爲防禦州。天顯三年,遷東丹國民居之,升爲南京。신책(神冊) 4년(919년)에 요양(遼陽)의 옛 성을 고쳐 발해인과 한인(漢人) 가구[戶]들로 동평군(東平郡)을 세우고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년(928년)에 동단국 사람들을 옮겨와 여기에 거주하게 하고 (동평군을) 승격시켜 남경(南京)으로 삼았다.- 遼史 卷38 志8 地理志2 東京道이를 통해서보면, 동경요양부 항목에만 중대한 오류들이 발견되는데,
평양(平壤)에 해당하는 연혁[청색으로 표시]와
양평(襄平)에 해당하는 연혁[적색으로 표시] 및 발해의 홀한성(忽汗城)인 중경(中京)에 해당하는 연혁[녹색으로 표시]이 혼합되어 있다. <요사>의 찬자들은 셋이 같은 곳이라 여기고 있으나, 셋은 엄연히 다른 곳이다.우선 청색의
평양에 관한 연혁은 고조선 및 고구려와 관련한 연혁인데, 이미 알려져있는바, 고조선이 존속하고 있던 시기에
양평은 요동지역에 별개로 공존하던 요동군의 중심지역이었으며 전국시대 연나라가 수도였던 계(薊)가 함락당한 뒤에
양평으로 도주하여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삼고있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요사>의 찬자들은 이를 구분해내지 못해내어 후술할 내용들과 모순에 빠지기에 해당 항목에서
양평이 연나라의 멸망지임을 명시하지 못했다.때문에 동경요양부 항목에서 서술되고 있는 연혁상으론 연이 요동군을 설치하면서 고조선을 쫓아낸 사실과 위만이 찬탈한 사실로 바로 이어지게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양평과
평양을 같은 곳으로 보고 있었기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서술상의 한계이다. 어째 소 뒷걸음치기식으로 고조선의 본래 영역을 맞추게 된 것 같은 느낌이 ㅎㄷㄷ
양평과
평양을 동일한 곳으로 보게되면서 발생한 오류는 그 다음 대목에서도 이어진다. 공손탁(공손도) 3대가 세력을 잡은 지역은 요동군
양평이지 낙랑군 조선(
평양)이 아니다. 때문에 서진과 고구려로 이어지는 연혁에서 대체로
양평에 대한 얘기가 서술되다가, 고구려가 낙랑군을 수복한 시기(동진시대)와 요동군을 수복한 시기(후연 말) 사이에 후연이
양평(
평양?)을 잠시 점거했던 것처럼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오류임은 명백하다.
양평을 평주(平州)로 삼은 것은 공손탁 정권이 시초고 삼국시대의 위나라때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가 서진으로 쭉 이어져 왔던 것인데, 여기서는 광개토대왕이 요동군을 평주목으로 삼은 것 처럼 서술해놓고 아예 이곳을 수도로 삼은 것 처럼 기술하였다.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평주목을 축출해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것에 불과하고,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엄연히 장수왕 때 이뤄졌다. 전술한대로 <요사>의 찬자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했기에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요양에 해당하는
양평에 있던 것 처럼 서술하게 되었다.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왠 발해의 홀한성(중경)에 관한 연혁이 혼입되어 버린다.(...) 기사 말미의 928년에 동단국 사람들을 요양에 옮겨오게 한 일 때문에 동경요양부에 소속된 발해인들에 대한 연혁과 혼합되면서 발생한 오류로 여겨지는데, 여기서도 <요사>의 찬자들은 홀한성과
평양을 같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착각을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홀한성은 대조영이 동모산 인근지역에 도읍한 곳이기에
평양과 같은 곳이 아님은 분명하다.(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인정하는 시각에서 이런 오류를 범한게 아닌가 싶기도...)발해는 수차례 천도를 단행했었는데,
평양=
양평=홀한성의 관점에서 셋을 같은 곳으로 놓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기에, 발해 말에 중경이 아닌 상경을 도읍지로 삼게된 점을 올바르게 서술하지 못하고, 사실상 상경성에 관한 사실들을 중경으로 개편된 홀한성의 일처럼 서술하게 되었다.이 대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굵은 글자로 표시한 부분이다. 발해가 '성국(成國)'으로 불려지게 된 시점과 5경 15부 62주의 제도를 시행하던 시점이 11대 임금인 대이진(大彝震) 때라고 나오고 이때에 이르러 '참호(僭號)'를 사용하기 시작해 그 격에 맞춰 궁궐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른 문헌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여기서 '참호'란 '황제를 참칭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발해는 임금을 가독부(可毒夫)라 부르고 기하(基下)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음이 <신당서>에서 언급되는데, 기하(基下)라는 호칭은 전설상으론 황제(黃帝)가 사용했다는 것으로 폐하(陛下)와 비슷한 급의 호칭이다.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공주의 묘지석들에선 임금을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대목이 발견되고, 지난 2009년에 발견된 발해의 금석문에서는 왕의 부인을 '황후(皇后)'로 표기한 것이 발견되었는데, 같은 금석문에서 그와 동시에 발해 임금은 문왕(文王)·간왕(簡王)등으로 명시하고 있어, 내부적으로 황제의 격에 맞는 왕실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으면서도 공식적으론 왕의 칭호를 사용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원(建元)에 관한 사실도 언급되는데, 이미 발해는 그 이전부터 독자연호를 사용해왔음으로 크게 의미가 없는 사실이다.<요사>의 찬자들이 건원에 관한 문제를 대이진부터 있던 일처럼 서술한 점이나, 앞서 언급한 '참호'란 표현을 서술한 점은, 발해가 대이진 때에 이르러 대내·외에 정식으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함을 공표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대목이 아니었나 생각된다.다른 문헌사료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이기에, 이 대목은 <요사>가 그 무수한 오류로 인해 사료적 가치가 낮은 점 때문인지, 발해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대이진 이후로 발해 임금의 시호(諡號)를 전혀 기재하고 있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대목에 대해서는 발해와의 교류가 단절되어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아 그렇게 서술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신당서>에서 12대 대건황(大虔晃)과 13대 대현석(大玄錫)까지는 멀쩡히 그 즉위사실을 기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임금의 칭호에 관한 정보까지 전달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요사>의 내용대로 대이진 이후로 황제를 대외적으로 공표하였기에 그러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대체로 15부 62주의 지방행정제도가 마련되고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시점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가장 많은 사실들이 서술되어있고 대외적으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였음이 확인되는 10대 선왕(宣王) 때의 일로 간주되고 있다. 11대 대이진 이후로는 발해가 쇠락기를 걷게 된 것처럼 여겨지는데, 앞서의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이 관점들은 어느정도 수정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료의 부족함 때문에 그 점이 얼마나 인정될지는 의문스럽다.흥미롭게도 <요사>지리지의 동경요양부 항목에선 발해 후반기에 관한 또다른 단편적인 사실이 기술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興遼縣。本漢平郭縣地,渤海改爲長寧縣。唐元和中,渤海王大仁秀南定新羅,北略諸部,開置郡邑,遂定今名。戶一千。흥료현(興遼縣) : 원래 한(漢)의 평곽현(平郭縣)이다. 발해(渤海)가 장녕현(長寧縣)으로 고쳤다.。당(唐)나라 연화(元和) 연간에 발해(渤海)왕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는 신라(新羅)를 평정하고 북쪽으론 여러 부락들을 경략(經略)하면서, 고을[郡邑]을 설치하였는데, 이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정해졌다. 1,000가구[戶]가 있다.기사의 대인수는 10대 선왕을 가리킨다.위의 흥료현의 위치는 현재는 파악할 수 없다. 상경(上京)의 현이었다가 요나라가 동단국을 요양으로 옮겨오면서 함께 교치(僑置)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요사>에서는 이를 요동군 평곽현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평곽현은 대체로 현재의 가이저우 시(盖州市)로 비정되며 요나라 때의 진주(辰州)에 해당된다. 또 <요사>에서는 진주(辰州)가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었다고 하는데 반해, 개모성은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기간 동안의 경로를 분석해보면 대체로 현재의 선양(沈阳)일대로 비정되므로, 모두 <요사>가 잘못된 연혁을 기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이 연혁기사의 후반 부분은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 되기도 하는데, 앞서 언급했던 15부 62주의 제도가 마련된 시점을 선왕대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그 부분외에 한가지 주목해보고자 하는 부분은, 선왕의 재위기간은 신라의 왕은 헌덕왕(憲德王) 재위기간에 해당되며, 헌덕왕 18년(826년)에 신라가 패강장성을 쌓는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참고] 또 <삼국사기>지리지에선 지금의
평양 인근의 대동강변 지점에 취성군(取城郡)을 비롯한 3현을 헌덕왕이 설치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런 사실들로 비추어 볼 때 위의 <요사>지리지 기사에서 발해 선왕이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南定新羅]"라고 했던 것은 나름의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비록 문헌사료들에서 신라와 발해의 무력충돌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헌덕왕 재위기간은 김헌창의 반란 사건을 겪는 대혼란기였으며, 패강장성의 설치를 지시한 시점은 헌덕왕 말년에 해당된다. 패강장성은 남강변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축조된게 아니라, 남강 상류에서 황해도 서흥군 일대에 이르는 남-북 방향으로 축조된 점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때, 관북지방(함경도)에서 내려오는 발해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임을 확인할 수 있다.김헌창의 반란 기간 중에 신라와 발해간의 무력충돌이 있었음과 이로 인해 반란 평정 이후에 패강진 일대의 방어를 재정비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출처] 대이진 이후의 발해의 동향에 관한 단편적 사료 -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조|작성자 지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