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의 통치이념은 중화민족의 부흥 즉 중국의 꿈(中國夢)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몽과 함께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 헌원(軒轅)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신화의 영역에 속했던 황제 헌원의 이야기를 고고학의 발달을 근거로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 같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우월적인 중화민족(華)과 그렇지 못한 주변민족(夷)간의 이른바 화이(華夷)를 엄격히 구분하는 화이질서(華夷秩序)를 구축하였다. 그 구분을 지어 준 영웅이 황제 헌원으로 보고있다.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북쪽으로 300km 정도 가면 황제릉(黃帝陵)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는 “황제께서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시고 추악한 치우(蚩尤)를 주살하시어 화(華)와 이(夷)를 구분지어셨다” 라는 문구가 있다. 매년 황제릉을 찾아 참배하는 국내외의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지 모른다.
사마천(司馬天)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국 고대에는 2차례 문명의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동양문명의 맹주를 놓고 벌린 치열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잔혹성을 묘사하여 “들판에는 피가 백리나 흘렀고 병장기가 핏물에 둥둥 떠 다녔다”는 과장된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 훤원은 2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초대 천자(天子)로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허베이성(河北省)과 랴오닝성(遼寧省)의 경계에 위치하는 장자커우(張家口) 인근의 반취안(阪泉 판천)에 일어난 반취안 전쟁은 황제 헌원(軒轅)이 이끄는 중화민족이 복희 여와 염제(신농)으로 이어지는 고대 삼황 부족과의 전쟁이었다. 황제 훤원은 화이(華夷) 혼합민족을 이끌고 있는 삼황부족의 최후의 왕인 염제와 반취안 전쟁을 통하여 승리한다.
삼황부족을 제압한 황제 헌원의 마지막 라이발은 산동성의 동이(東夷)족을 통솔하는 치우였다. 치우는 삼황부족의 잔존 민족과 구려족(九黎族) 등 80여개의 변방 민족을 결속시켜 세력을 과시하였다. 장소는 반취안 인근의 줘루(탁록 ?鹿) 지방이다.
황제 헌원은 줘루전쟁에서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막강한 치우세력을 격파하였다. 치우 세력이 패배하자 구려족이 분산되어 남방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묘(苗)족 려(黎)족 등이 되었고 치우의 세 아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 중 한 아들이 동북으로 달아나 지금 한반도인의 선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줘루 전쟁에서 치우는 망했지만 싸움을 잘하는 치우왕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여 진시황은 치우의 사당을 만들었고 유방도 항우와 싸우기 전에 반드시 치우왕에게 무공을 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치우왕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그가 동이족으로 분류되어 단군의 선조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한반도에서도 치우왕을 전쟁의 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무장들은 출진하기 전에 반드시 치우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도 치우사당에서 제사지낸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 한반도에는 치우사당이 많았다. 서울에서 치우왕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 성수동에 있는 뚝섬이다. 뚝섬은 본래 한강과 중량천에 둘러싸인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일시 섬이 되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무장 출신이라 새로 도읍을 정한 한양에 사냥터가 필요했다. 그는 지금의 뚝섬에 치우사당을 지어놓고 치우왕을 상징하는 치우기(纛旗 독기)로 치우사당을 표시하였다. 독기에는 검은 쇠꼬리나 꿩 꼭지 털로 만든 장식물을 달았다고 한다. 뚝섬은 본래 독기가 있는 섬을 의미하는 독도(纛島)가 뚝도 뚝섬으로 변형되었다. 지금의 뚝섬은 치우사당이 있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역대 조선왕조의 왕들은 이곳을 사냥터로 정해 놓고 신하들이 활을 쏘게 하고 직접사열을 하여 무예를 연마했다. ‘화살곶이벌’ ‘살곶이(箭串)벌’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이곳 사냥터에서 나왔다. 이러한 전통으로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은 뚝섬에 나와 사냥을 겸하여 무예를 익히고 갑옷차림으로 치우사당에 치우제(纛神祭 독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홍수로 유실되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의 치우사당에는 치우왕이 황제 헌원이 싸웠던 ‘탁록 전투도’가 걸려 있었다. 치우왕은 전쟁에 패배하여 천하의 맹주가 되지 못했지만 황제 헌원의 후손인 중화민족을 제외한 주변의 소수 민족 즉 동북아시아 지역의 여러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에서 치우왕의 스토리가 남아 있는 뚝섬에 치우사당을 복원하고 내친 김에 황제릉과 같은 ‘치우릉(蚩尤陵)’을 조성한다면 어떨까. 중화민족 이외의 치우왕 후손들인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치우사당에는 황제와 치우의 대전인 ‘탁록전투도’를 그려 놓으면 요우커(遊客)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자녀들에게는 광활한 중국을 무대로 천하를 다투어 싸운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상상력을 키워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줘루(탁록)전쟁의 최종 승리자인 황제 헌원은 자신을 포함 후손인 전욱, 곡, 요, 순 등 5제 시대를 연다. 마지막 순(舜)임금의 신하 중에 우(禹)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하 치수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도 돌보지 않고 양서류처럼 항상 물과 가까이 하면서 치수사업을 성공시킨다. 후에 순임금의 천거로 왕이 된 우는 새로운 국가 하(夏)를 창건한다. 기원전 2070년경이다.
중국은 중국몽의 장기포석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내 세우고 있다. 육지와 해양의 신 실크로드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둔화되고 있는 경제성장을 밖에서 끌어 오겠다는 발상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금융지원을 위해 57개국을 창립회원국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한다. 중화민족(華)이 주변민족(夷)과 협력 동반성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중국몽은 황제와 치우왕의 구분을 통하여 화이질서를 강조했지만 새로운 중국몽은 황제와 치우왕 후손들의 화이공영(華夷共? 윈.윈)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중국몽은 화이협력(華夷協力)의 신시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