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삼별초를 대단한 애국지사인냥 띄운 사람도 생각보다 별로 없었고
정통성없는 군사정권과 여순반란으로 정통성을 잃은 세력들과 야합으로 미화된게 삼별초죠.
일단 고려사에 나온 삼별초가 어떤 집단인지 이야기를 해주겠습니다.
"정문감은 과거에 급제해 직학(直學)에 임명되었다. 원종 11년(1270),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제멋대로 관직을 설치하고는 정문감을 승선(承宣)으로 임명해 정무를 맡게 했다. 정문감은, “적도 편에 붙어서 부귀를 누리느니 차라리 저승으로 가 몸을 깨끗이 지니련다.” 하고는 바로 강물에 투신해 자결했다. 그의 처 변씨(邊氏)도 정문감이 자결하는 것을 보고 역시 강물에 투신했다. 변씨는 서해(西海) 안찰사(按察使) 변윤(邊胤)의 딸이다. "
고려사 정문감 충의 열전
"진도(珍島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로 들어간 반적들이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주·군(州郡)을 노략질하자 왕은 김방경(金方慶)을 시켜 토벌에 나서게 했다."
고려사 배중손 반역 열전.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경은 강화경(江華京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다가 가족을 데리고 옛 수도로 배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적에게 잡혀버렸다. 유경은 처자를 작은 배에 태우고 재물을 큰 배에 실어 두고는 적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가 더위를 먹은 것처럼 부러 구토를 하고는 작은 배로 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적이 허락하자 유경은 닻줄을 끊고 달아났는데 적이 뒤쫓았으나 따라 잡지 못했다."
고려사 류경 열전.
"고을 사람 조천(趙仟)이 군수(郡守)를 죽이고 진도(珍島)의 반적(叛賊) 삼별초(三別抄)와 호응하였기 때문에"
세종실록(참고로 조선왕조실록 중에 제일 믿을수 있는 실록)
"임연의 무리인 삼별초(三別抄)가 승화후(承化侯) 를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원종(元宗)이 김방경에게 명하여 이를 토평(討平)하게 하였는데, 삼별초의 무리가 탐라(耽羅) 로 도망해 들어가니 김방경이 또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습니다.
단종실록
우리나라 역사서 중 가장 믿을만하다는 조선왕조실록도 삼별초를 저렇게 기록하는군요.
갑신정변때 반란보다 훨씬 추접스럽고 더럽네요. 친원파도 아닌 사람들도 저러했으니.
뭐 고려사에 내용도 내용이지만 실상 길속기 등을 통해 다시한번 만천하의 역적이라는게 드러나는게 바로 이것입니다.
"몽고가 일본을 공격하려 할것이다 군사와 식량을 보내달라"
삼별초정권의 세력권 확보 1271년(원종12) 진도에 입거(入據)한 초기 삼별초정권은 몽골 아카이(아해, 阿海, Akai)군에 대한 군사적 제압에 고무되어 기세를 올렸다. 삼별초군은 전라·경상도 남부 연안의 섬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연해 지역에 대해서도 일정한 세력권을 확보했다. 밀성(밀양)·개경 등지에서는 진도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나는 등 정세는 비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확보된 세력권이 주로 남부 연안의 연해와 도서지방이었기 때문에 향후 몽골군의 강력한 공세를 지속적으로 막아내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여건은 삼별초정부로 하여금 일본과의 연결을 희망하게 했다. 진도정부의 일본에의 사신 파견 진도정부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대몽항전에 공동의 보조를 취하며 협조해줄 것을 타진하게 된 것은 1271년(원종12)의 일이다. 진도에서 보낸 서신은 진도정부가 몽골군에 의해 무너지고 한참 뒤인 9월 초에야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를 거쳐 경도(京都)의 조정에 전달되었다. 이 첩장(牒狀)을 가져간 삼별초의 사신은 대략 1개월 쯤 전인 7월 말 이전에 일본의 하카다(博多) 부근에 도착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는데, 진도에서의 출발은 진도가 공함(攻陷)되는 5월 15일 직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도정부가 일본에 보낸 서신의 내용은 <길속기> 1271년 9월 4일조의 기록에 의하면, 진도정부는 몽골이 일본을 치게 될 것임을 먼저 경고하고 아울러 지금 몽골과 싸우고 있는 삼별초정부에게 식량과 병력으로 협조해 줄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볼 때 몽골군의 대공세를 앞둔 삼별초군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병력과 식량, 두 가지 모두 상대적인 열세를 느끼고 항전의 수행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감이 일본과의 연대를 통한 대몽항전 전개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현재 사용 중에 있는 고교 일본사 교과서의 하나인 삼성당 <상해(詳解) 일본사(日本史)>에는 고려의 대몽항쟁 및 삼별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이 같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하여 각지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고려에서는 삼별초라 불리는 군대와 민중이 강화도와 탐라(제주도)를 근거지로 1273년까지 원에의 저항을 계속하고, 또 대월(大越)에서도 1257년 이래 3회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 책에서는 삼별초의 항전을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삼별초는 당시 고려정부의 군사조직으로 고려왕조가 원에 복속한 이후도 저항을 계속했다. 그들은 민중의 지지를 강하게 받고 고려 각지에서 민중이 이 반란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원이 일본을 정복할 수 없었던 이유로서 일본군의 분전도 있었지만, 고려 삼별초의 란에서 보아지는 것처럼 동아시아 사람들의 원에 대한 저항이 각지에서 있었던 것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